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문화마당 / 죽은 예술가의 사회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문화마당 / 죽은 예술가의 사회

입력
2001.02.15 00:00
0 0

10일은 미당 서정주 시인의 49재였다. 반 년 사이에 황순원, 미당, 운보 김기창 선생이 모두 유명을 달리했다.큰 기둥들이 스러진 빈 자리로 문화계가 허전하다. 현대사에서 그들은 우리의 교사였고 벗이었다. 그들은 명석한 언어와 아름다운 이미지로 세상과 자연에 대한 감성을 일깨워주었고, 새로운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 주었다.

그들의 타계는 또한 한 세기의 종말과 새 세기의 출발을 알려주는 신호이며, 시간의 흐름에 순응하는 것이 자연의 섭리라는 엄연한 사실을 가르쳐 준다. 이럴 때, 죽음마저 관조하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로마황제의 '명상록'은 위안을 준다.

'인간의 삶이 일순간 동안만 지속될 뿐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라. 온유하고 흡족한 마음으로 세상을 떠나라.

마치 잘 익은 올리브 열매가 땅에 떨어지면서 자기를 있게 해준 대지를 찬양하고, 자기를 맺게 해준 나무에게 감사하듯이.'

거인의 작품과 행적은 사후에도 사회에 크고 긴 영향을 미친다. 그들의 예술은 길이 기억되겠지만, 특히 황순원 선생의 행적은 작품과 함께 투명한 그림자를 오래도록 드리울 것 같다.

그는 처음에 시를 썼다. 일본 유학 시절인 1934년 첫시집 '방가(放歌)'를 냈다가, 이 시집으로 인해 경찰서에 29일간 구류되었다.

일제의 간섭과 통제가 점점 심해지자 시ㆍ소설을 쓰되 발표는 하지 않고 원고를 책상 서랍 속에 쌓아 두었다.

그는 정치적 혼탁이 이어진 해방 후 소설에 진력하는 한편, 문학적ㆍ철학적 단상이나 시도 계속 써나갔다. 그러나 정치적이거나 시사적인 산문은 쓰지 않았다.

정치 문제에 초연한 것 같던 그도 제5공화국 군사정부 아래서는 다른 면모를 보여 주었다.

85년 12월 26일 그는 문화공보부를 찾아가 '창작과 비평사'에 대한 당국의 폐쇄조치를 취소하라는 동료 문인들의 건의문을 전달했다.

창비사는 당시 과감하게 반정부적 논지를 펴고 있었고, 그와 동행한 문인ㆍ교수는 박완서 이호철 이효재씨 등 모두 창비사와 입장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었다.

의외였던 것은 그가 '문지 문인'으로 불리는 작가였지 '창비 문인'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12권에 이르는 그의 문학전집은 '문학과 지성사' 에서 발행되고 있었다. 그가 '창비'니 '문지'니 하는 벽을 깨고 항의방문에 나선 것은, 자신을 필요로 할 때 지식인적 자세를 보여 준 또 하나의 예가 될 것이다.

96년 정부가 주려는 은관문화훈장을 거부한 데서도 그의 선비적 혹은 지식인적 고집과 꼿꼿함을 읽을 수 있다. 그의 시 중에 엄정한 자기성찰의 자세를 보여 주는 산문시 '위치'가 있다.

숫눈 위에 한 줄 사슴의 발자국. 그리고 피 얼룩이 남겨졌다. 이어서 사냥꾼들이 내 곁을 지나 부산하게 사슴의 뒤를 추적해갔다. 다시 눈 속을 거닐다 보니 나는 사슴이 섰던 등성마루턱 그 자리에 서있었다.>

근래 타계한 대가들에 대한 추모의 정서와 아쉬움 속에 한 가닥 씁쓸함이 끼어 드는 점도 부인할 수 없다.

많은 문학적 업적을 남긴 미당에게서 지워지지 않는 친일ㆍ친군부적 행적과, 운보의 친일 흔적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하는 점이 곤혹스러운 것이다.

문화계가 이 문제로 인해 자기분열적 태도를 보이고 있기도 하다. 시간이 많은 것을 해결해 줄 터이지만, 이런 곤혹스러움 속에 작품만큼이나 깨끗하고 고집스러운 행적을 남기고 있는 황순원 선생은 커다란 위안을 준다.

박래부 편집국 부국장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