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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속으로] 新幹會

입력
2001.02.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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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2월15일 좌우 합작 민족운동 단체인 신간회가 출범했다.신간회는 '민족 단일당 민족협동전선'이라는 표어 아래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가 손을 잡고 만든 단체다. 안재홍 백관수 신채호 등 34인이 발기인으로 이름을 올렸고, 초대 회장에 이상재를 선임해 출발했다.

"우리는 조선 민족의 정치적ㆍ경제적 해방의 실현을 기함""전민족의 현실적 공동이익을 위하여 투쟁하기를 기함"이라는 정강정책에서도 드러나듯, 신간회는 조선총독부가 용인한 합법 단체이면서도 민족해방이라는 비타협적목표를 또렷이 내세웠다.

신간회는 지난 한 세기동안의 우리 민족 운동의 역사에서 좌파와 우파가 손을 맞잡고 민족 해방이라는 대의를 위해서 통일 전선을 형성한 거의 유일한 예다.

신간회 성립의 밑바탕에는 식민지 사회에서는 계급 운동과 민족 운동이 서로 스며들 수밖에 없다는 당시 좌우파 지도자들의 성숙한 인식이 자리잡고 있었다.

신간회에는 좌우파를 막론하고 일제의 식민주의에 반대하는 범민족 진영 대부분이 참여했다. 그 조직의 속도도 빨라서, 삽시간에 전국에 200여 개의 지회ㆍ분회가 생겨나 30년에는 그 회원수가 3만9천에 이르렀다.

신간회에 대한 일제의 시각은 "배일선인(排日鮮人) 가운데 알려진 인물은 거의 여기 가입했고, 이 운동의 도달점은 조선의 독립에 있다. 이들은 반항적 기세를 선동하여 분규 확대에 힘쓰고."하는 고등경찰 요사(高等警察要史)의 기록에 잘 나타나 있다.

29년 11월 광주 학생운동이 일어나자 신간회는 이를 지원하는 한편 대규모의 민중대회를 준비하다가 조병옥 이관용 등 간부 44명이 체포돼 위기를 맞았다. 그러나 신간회가 31년 5월에 해산한 것은 일제의 직접적 탄압에 의해서가 아니라 내부의 좌우 갈등을 극복하지 못해서다.

고종석 편집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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