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신 미확인 실종자 30명 포함 사망자 502명, 부상자 937명."마하로 달린다 해도 다 잊혀지지는 않을 거야."
하성란씨의 소설 '루빈의 술잔'의 주인공 '여자'는 생각한다. 1995년 6월 29일 발생한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는 그렇게 잊혀질 수 없는 채 우리 앞에 서 있다.
서울 서초구 서초동의 사고 현장은 지금은 초고층 아파트 신축공사 현장이 되어있다. 은색의 철골로 외벽을 둘러 사방을 단단하게 차단한 채 포크레인과 크레인, 불도저 등이 그 매몰의 비극적 현장을 다지거나 다시 파헤치고 있다. 인근 아파트 외벽에는 '아파트 단지 시설용 땅에 37층 아파트가 웬말이냐' '생활환경 침해하여 폭리만 노리는 XX그룹은 사업 포기하라'라고 외치는 플래카드들이 나붙어 있었다.
'루빈의 술잔'은 이 붕괴사고를 배면으로 다루고 있다. "입버릇처럼 트렌치코트 노래를 불렀잖어.
12시 30분 P백화점 2층 커피숍에서 기다릴게. 시간 약속 지켜." 남편이 말한 약속시간을 20분 넘겨 도착한 여자는 10분 전에 백화점이 주저앉은 것을 본다. 이후 여자는 살고 있는 아파트 문 밖을 나서지 못한다. 유통기한마저 다 된 36개의 통조림을 먹어치우고, 관리비가 연체되어 화장실에 악취가 풍겨서야 여자는 집을 나서 경인고속도로 위에 차를 올려놓는다. 아무리 속도를 내도 잊혀지지는 않는다.
하씨의 소설 중 현실 문제가 직접적으로 배경이 된 작품은 손으로 꼽을 정도다. 이유도 없지 않았다. 매몰 후 230시간만에 기적적으로 구조됐던 최명석(崔明錫)군.
"최명석군이 아르바이트를 했던 아동신발 가게의 여주인이 제가 잘 아는 이웃집의 절친한 언니였지요. 그 언니가 가게를 내면서 제 막내 여동생더러 아르바이트할 수 있겠느냐고 했었습니다. 남의 일이 아니라는 말이 그처럼 실감날 수가 있을까요.
우리가 갖고 있던 모든 상식이 한 순간에 무너진 사건이었습니다." 현실은 어느 순간에 악몽처럼 개인을 덮친다.
'루빈의 술잔'의 여자는 하룻밤 사이에 경인고속도로를 세번 왕복한다. 경인고속도로는 하씨가 출판사에 다니던 무렵, 매일 왕복하던 길이다. 영등포를 지나 톨게이트를 거쳐 인천 초입에 이르면 '개항 100주년 기념탑'인 청동상이 서 있다. 여자는 이 청동상을 끼고 돌아 연안부두 어시장 부근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잃는다. '일년 내내 질척질척한 바닥 위로 붉은 젓갈을 담아놓은 커다란 양철 깡통들이 보이고 반쪽이 이미 회로 쳐지고 뼈가 드러난 커다란 민어와 광어가 보인다.'
어시장에서 하씨는 익숙한 주부처럼 명란젓, 오징어젓을 사기도 했다. 생활 주변에서 보고 듣고 만지는 모든 것을 소설로 육화한다 할 정도로, '마이크로 묘사'로 불리는 그의 문장은 카메라로 근접촬영하듯이 일상을 극사실적으로 묘사한다. '사람들이 떠나도 집은 여전히 기억을 갖고 있다'는 하씨의 표현은 외롭게 실존을 감내하고 있는 모든 존재가 저마다 아득한 심연과 함께 구원의 영역을 동시에 갖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장치임을 암시하는 듯하다.
'루빈의 술잔'은 무엇일까. 사전적 정의는 '같은 도형이면서도 보고 있는 중에 원근 또는 그밖의 조건으로 뒤바뀌어, 다른 그림으로 보이는 도형'이다.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로 인한 여자의 삶의 반전은 루빈의 술잔의 한쪽 면이다. 또 한 면은 다른 주인공인 은행원 송미경이다. 그들은 우연히, 옛 주민등록 담당 동사무소 직원의 착오로 인해 꼭 같은 주민등록번호를 갖게 됐다. 여자가 송미경을 찾아나서는 이야기로 인해 비로소 소설은 완성된다.
같은 주민등록번호를 가진 두 여자. 한 사람은 숨은 그림찾기 그림을 그리는 화가이고, 한 사람은 10년째 승진도 못한 채 '한흥은행 남서울 지점 2번 창구'에 앉아있는 은행원이다. 겉으로 달라보이는 그들은 공통적인 생의
불구성을 경험한다. 여자는 남편의 실종으로, 은행원은 어린 시절 엄마의 가출에 따른 사고로 왼쪽 다리를 절게 됐기 때문이다.
두 인물의 설정에서 하씨는 현대 사회의 익명성을 보여주려 한다. '여자'라고만 지칭되는 주인공의 호칭도 그렇다. 여자는 아마 호기심에서 자신과 주민등록번호가 꼭 같은 은행원 송미경의 집을 찾아가 닫힌 문 앞에 선다. 그녀는 자신이 주민등록번호의 뒷자리 7개 숫자 중 한 자씩을 건너뛴 네 개의 숫자로 조합해 쓰고 있는 비밀번호를 잠금장치에 입력한다. 숫자는 그대로 들이맞았다. 이때 상징적인 것은 이웃집 아이의 말이다. "아줌마 두드려도 소용없어요. 거긴 그림자 인간이 살아요." 아이는 단지 자신이 요즘 열중하고 있는 만화영화를 이야기한 것이었지만, 하씨는 이 대목에서 도시의 사람살이를 '그림자 인간'에 비유하고 있다
여자는 송미경이 은행으로 출근한 동안 그의 집으로 들어가, 전혀 악의 없이 송미경의 싱크대와 옷장과 침대를 살펴본다. 그리고 샤워도 하고 커피도 사다 놓고, 이웃집
여자와 인사도 나눈다. 송미경은 그러나 여자의 출현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다. 방 안에 떨어져 있는 뜨개질 모티프를 보고는 한 달에 한번씩 다녀가는 친구가 왔다 갔나 보다고 생각할뿐이다. 송미경에게 유일한 구체적인 삶은 T시에서 혼자 목수일을 하며 살아가는 아버지를 찾아가는 것이다.
이러한 익명적인 삶의 조건, 개인적 존재성의 상실이야말로 도시인의 존재론적 근거라는 것은 하씨가 다른 여러 작품에서도 보여주고 있는 주제이다. 삶과 같이 건조하디 건조한 문체로 쓰는 것이 하씨의 소설이다. 하씨는 "선은 악에 당할 수 없다. 악은 악으로 풀어야 한다. 나는 더 위악적으로 쓰려고 한다"고 말했다. "이제 문학은 해결을 주는 것보다, 소수의 독자들이 힘들여서라도 다 읽고 나서야 "아, 그래!" 하고 느낄 수 있는 것이면 된다"는 것이 그의 소설론이다.
그러나 루빈의 술잔은 결국 하나의 사물이다. 주변의 조건으로 일시적으로 다르게 보일지라도 그것은 하나의 존재다. 은행원 송미경은 여자가 자신의 방에 남기고 간 뜨개질 모티프를 가지고 장미꽃 문양의 식탁보를 만들기 시작한다. 여자는 다시 송미경의 집으로 찾아가지만 그 사이 주민등록번호가 바뀌어 송미경의 비밀번호도 바뀌어 있었다. 여자는 송미경에게 '꼭 만나보고 싶어요'라는 쪽지를 쓰지만.. 그녀에게도 새로 바뀐 주민등록번호로 된 새 여권이 배달되면서 소설은 끝난다.
하씨는 곧 씨랜드 화재사건을 다룬 작품을 발표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19명의 어린 목숨을 앗아갔던 씨랜드 사건도, 또 삼풍백화점 사고도 그의 표현처럼 "주머니 뒤집히듯이" 돌연한 침입자에 먹혀버리고 마는 우리네 평범한 일상의 상징이다. 하씨는 현장을 내려보며 "작가는 현실에 대한 적당한 거리와 연민을 함께 가진 천사의 눈으로 써야 한다고 하지만, 이곳을 보면서는 무당처럼 굿판이라도 벌이고 싶은 심정"이라고 말했다.
/글= 하종오기자 joha@hk.co.
●약력
▦ 1967년 서울 출생 ▦ 1992년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졸업 ▦ 199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단편소설 '풀' 당선 ▦ 소설집 '루빈의 술잔' '옆집 여자' 장편소설 '식사의 즐거움' '삿뽀로 여인숙' 등 ▦ 동인문학상(1999) 한국일보문학상(2000)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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