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능욱(43) 9단.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신출귀몰하는 공격력에 호탕하고 자유분방한 기풍 덕분에 별명도 자랑스런 '반상의 손오공'. 국내 타이틀전 준우승만 통산 13회. 포스트 조훈현 시대를 이끌 '도전 5강'의 선두 주자.물론 기억도 가물가물한 십수년 전 전성기 때 이야기다.
지금은 바둑 나이로 '환갑'을 훌쩍 넘긴 노장. 갓 입단한 신예들에게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면서 동년배 기사들과 함께 '퇴물' 취급을 받아온 지 오래다. 예선 탈락을 밥 먹듯 하다 보니 지난 해엔 총 대국수가 고작 20여국. 성적 통계에도 잡히지 않는 빈국(貧局)이다. 남들은 평균 70~80국을 두는 동안 구경만 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러던 그가 요사이 몰라보게 달라졌다. 7일 열린 제20기 KBS바둑왕전 본선 제8국에서 놀랍게도 지난 대회 우승자인 '괴동' 목진석 5단을 꺾었다. 청년 시절 못지 않은 날카로운 공격력을 보이며 시종일관 상대의 얼을 빼놓더니 200 수 만에 백으로 불계승, 사뿐히 승자조 8강에 선착했다. 목 5단이 누구인가. 지난 해 세계 최강 이창호 9단으로부터 바둑왕 타이틀을 빼앗으며 반상 쿠데타의 불길을 당긴 주역이 아니던가. 실력으로 보나 기세로 보나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대이변'이었다.
이에 앞서 서 9단은 제6기 LG정유배 예선 결승에서도 324수까지 가는 대접전 끝에 '바둑 황제'조훈현 9단의 발목을 잡으며 본선에 진출했다. 이 대회에선 지금 이창호 9단과 루이나이웨이 9단, 최명훈 7단, 이세돌 3단 등 강호들과의 일전을 기다리고 있는 중. "이대로 역사 속에 사라질 수 없다"며 사그라들던 마지막 불꽃을 다시 피우고 있는 그의 투혼이 놀랍다.
'입신(入神ㆍ9단의 별칭)'들의 대결장인 맥심배에서도 '잊혀진 기사'의 투혼이 빛나고 있다. '학구파'양재호(38) 9단이다. 1989년 제1회 동양증권배 우승을 끝으로 하향곡선을 그리며 이렇다할 성적을 내지 못했던 그는 제2기 맥심배 입신연승최강전에서 강호들을 연파하고 당당히 결승에 올랐다. 6일 한국기원 바둑TV 스튜디오에서 열린결승3번기 제1국에선 '세계 최고의 공격수'유창혁 9단에게 244수 만에 흑 6집반승, 기분 좋은 출발을 한 상태다. 한 판만 더 이길 경우 동양증권배 이후 장장 12년 만에 우승컵을 안게 된다.
지난 해 성적은 29승 14패로 승률 67.44%. 고단진 중에서는 손으로 꼽을 정도로 좋은 기록이다. 목진석, 원성진, 김승준, 안조영, 윤현석 같은 신예 강자들도 잇따라 무릎을 꿇었다. 징크스에 시달려 온 동갑내기 '천적'최규병 9단한테도 지난 해부터는 7대 3 정도로 우위를 지키고 있다. 좀 더 지켜봐야겠지만 기록상으로는 완전히 '재기'에 성공한 듯한 모습이다.
신예 진영에서는 프로 입문 4년이 넘도록 그늘에 가려져 있던 '무명의 기사'가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97년 입단한 안영길(21) 3단이다. 이세돌ㆍ최철한ㆍ원성진 등 쟁쟁한 강자들의 틈에 묻혀 명함조차 내밀지 못했던 그는 지난 해 하반기부터 상승세가 눈부시다.
10월께부터 무패 행진을 거듭하더니 제35기 왕위전, 제6기 LG정유배 프로기전에 이어 제20기 KBS바둑왕전까지 3개 기전의 본선에 연속 진출하면서 48승 13패(78.69%)를 기록, 다승 6위, 승률 5위에 껑충 뛰어올랐다. 급기야 왕위전 본선리그 첫 대국(2일 한국기원)에서는 지난 해 바둑계 MVP에 빛나는 '불패소년'이세돌을 134수 만에 백 불계로 제압, 파란을 일으켰다. 이에 앞서 열린 KBS바둑왕전 본선1국에서도 포스트 이창호의 원조 격인 '신4인방' 윤성현 6단에게 208수 만에 백 불계승을 거두며 탄탄한 기본기를 과시했다.
서능욱, 양재호, 안영길. 이들의 활약상은 갈수록 조로(早老)현상이 빨라지고 있는 우리 바둑계에 신선한 활력소이자 교훈이다.
변형섭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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