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472년 백제의 개로왕이 북위에 밀서 한장을 보낸다. 같이 손잡고 고구려를 치자는 내용의 이 문서는 어떤 경로에서인지 고구려 왕실에 들어가 망국을 재촉하는 화근이 된다.3년 뒤 장수왕이 3만 대군을 이끌고 한성을 침략, 백제 왕성을 포위하고 불을 지른다. 고구려 군은 개로왕을 붙잡아 얼굴에 침을 뱉는 욕을 보이고 아차산 아래서 살해한다. 성내의 왕후장상과 백성들도 죽거나 혹은 쫓겨나고, 백제는 웅진으로 남천한다.
■삼국사기와 일본서기에 남아있는 기록이다. 그 때 불탄 왕성이 기원전 18년 온조가 도읍한 이래 493년을 이어온 하남 위례성(河南 慰禮城)이다.
북으로 한수를 두르고 동으로 높은 산에 의지하며, 남으로 기름진 평야를 바라보고 서로는 큰 바다로 통하는 천험지리(天險地利)를 취해 도읍을 삼았다는 하남 위례성은 그렇게 무너진 뒤 역사에서 사라지고 만다. 불탄 폐허 위로 홍수가 몰고 온 토사가 1500년을 싸이고 또 싸인 것이다.
■위례성의 위치는 우리 고대사 최대의 수수께끼였다. 조선시대 정약용은 하남시 춘궁동을 후보지로 추정했으나 최근의 발굴조사에서 훨씬 후대의 유물들만 나왔다.
직산 위례성과 강동구 몽촌토성에서도 결정적 증거가 될 유물은 나오지 않았다. 을축년(1925년) 대홍수 때 씻겨나간 풍납토성에서 청동제 초두가 출토돼 일부 학자들의 주목을 끌었으나, 왕성이 아니라 수비성인 사성(蛇城) 같다는 이병도박사 주장으로 관심권을 벗어났다.
■자연과 인간의 힘에 의해 파손될 때만 유적은 입을 여는 것인가. 97년 풍납토성 자리에 아파트 공사가 시작되자 이곳을 하남 위례성으로 주장해온 역사학자 이형구(선문대)교수에 의해 의문을 풀 단서들이 햇빛을 보게 된다.
4m 땅속에서 불탄 건물 흔적들과 함께 귀중한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아직 결정적인 증거가 나오지는 않고 있지만, 이곳이 가장 유력한 후보지라는 것을 모두가 믿게 되었다. 며칠 전 그곳을 사적지로 지정한 것은 문화 후진국 오명을 씻어줄 낭보였다.
/문창재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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