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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천의 자연과 세상] 배아복제, 현실적·인간적 길 찾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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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천의 자연과 세상] 배아복제, 현실적·인간적 길 찾자

입력
2001.02.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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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22일자 본인의 글 '생명의 시작, 그 공허한 논란'에 대해 강릉대 생물학과 전방욱 교수가 반론을 제기했다.우리 두 사람의 견해가 한데 "어우러져 생명윤리를 바르게 확립하는 데 일조하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는 전교수의 바람에 전적으로 동의하며 그가 지적한 사항들에 대해 답하고자 한다.

우선 "배아를 인위적으로 복제할 수 있다는 시점의 기준은 배아를 마음대로 폐기할 수도 있는 시점의 기준도 된다"는 그의 경고에 머리를 숙인다.

배아복제 실험을 마친 후 그 배아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결코 가볍게 다룰 수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나라를 비롯하여 세계 각처에서 벌어지는 낙태시술의 현장을 재현해서는 절대 안 된다.

우리 모두 이마를 맞대고 이런 모든 순간에서 절대로 생명의 존엄성이 훼손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나는 결코 수정란을 완벽한 생명체로 볼 수 없다고 해서 그들을 마구 다뤄도 괜찮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다만 '생명체의 시작'을 논한다는 것이 공허한 일이라고 지적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 공허하고 모호한 기준에 따라 생명과학자들의 연구활동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일은 더더욱 불합리하다는 사실을 일깨우고 싶었다.

전교수가 지적한 사항들은 모두 그 나름대로 논리적이고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는 내가 애써 구분하려 했던 '생명'과 '생명체'의 차이를 간과한 듯 싶다.

거듭 강조하건대, '생명의 시작'은 DNA의 탄생과 때를 같이 한다. 그 태초의 바다에 떠다니던 많은 화학물질들 중에 어느 날 우연하게도 자기 자신을 복제할 줄 아는 묘한 화학물질인 DNA가 나타나 지금에 이르기까지 수십 억 년 동안 다양한 '몸'들을 만들며 살아온 것이 바로 생명의 역사다.

지금은 비록 인간의 몸 속에, 그리고 개미와 은행나무의 몸 속에 들어앉아 있지만 그 모든 DNA는 전부 하나의 조상 DNA로부터 분화한 자손들이다.

이런 점에서 생명이란 하나의 생명체의 관점에서 볼 때 분명히 한계성(ephemerality)을 지니지만 DNA의 눈으로 보면 태초부터 지금까지 면면히 이어온 영속성(perpetuity)을 지닌다.

무성생식을 하는 생물들의 경우에는 DNA가 복제된 후 몸이 갈라지기만 하면 번식이 이뤄지지만, 유성생식을 하는 생물들은 자신의 DNA의 절반을 운반하는 난자와 정자를 만들고 그들이 서로 만나야 비로소 수정란이 된다.

난자와 정자도 생명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러나 그들을 별개의 생명체로 보기는 어렵다. DNA가 가진 생명은 생명체에서 생명체로 이어진다. 난자와 정자는 연결고리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난자와 정자가 만나서 형성된 수정란은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각각의 생식세포가 융합해 독특한 재조합 DNA"를 가지는 것이 수정란이라는 전교수의 지적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단위생식을 하는 생물의 경우에는 두 생식세포들이 융합하는 것도 아니고, 그들의 '수정란'속 DNA는 '독특성'을 지니지 못한다.

또한 수정란을 몸 속에 품어 키우는 포유류를 제외하면 다른 많은 동물들에서 수정란은 그다지 존엄한 존재가 아닌 듯 싶다. 여기저기 알을 뿌리고 돌아서선 자기 알 남의 알 할 것 없이 먹어치우는 물고기들을 보라.

나는 수정란의 생명을 절대로 인정해선 안 된다고 하지 않았다. 지나치게 인간중심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자연계를 두루 둘러보면 수정란을 하나의 완벽한 생명체로 보기 어렵다고 했을 뿐이다.

또 인간이 자의식을 얻어야만 비로소 생명체로 인정할 수 있다고도 하지 않았다. 또 의식과 자의식간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인간을 제외한 다른 동물들에게 자의식을 부여하기는 힘들어도 그들에게 의식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억지로 '생명체의 시작'을 논해야 한다면 유전자가 만들어준 몸이 독립적인 의식을 확보할 때로 보는 것이 수정란으로 보는 것보다 덜 비합리적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지난 번 글에도 밝힌 대로 이 같은 논란은 공허하다. 생명의 시작은 논할 수 있어도 생명체의 시작을 정하기는 어렵다.

다만 인문사회학자들과 자연과학자들이 함께 가장 현실적이고 '인간적'인 길을 찾아야 할 것이다. 본인의 글이 나가고 며칠 후 영국 상원은 연구목적의 인간 배아복제를 허용하는 법안을 통과했다.

싫던 좋던 판도라의 상자는 이미 열리기 시작했다. 우리도 이 같은 연구에 참여해야 한다는 나의 주장은 전교수가 지적한 대로 "윤리적으로 당위성이 있는 주장은 아니다." 그러나 피할 수 없는 문제인 걸 어찌하랴.

생명과학도들에게 윤리교육을 시켜야 한다는 전교수의 제안에 동의한다. 생명과학자들도 자진하여 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자기 규율을 만드는 것이 바로 규제를 덜 받는 길임을 깨달아야 한다.

생명과학자들이 스스로 일어설 수 있도록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줄 것을 거듭 촉구하는 바이다.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

jcchoe@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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