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희선(27) 감독은 스무 살까지 할머니와 살았다. 엄마가 장사를 하고,연년생으로 태어난 남동생 때문에 힘들어 어릴 때 맡긴 것이다. 할머니는 엄마나 다름없다.할머니는 가족을 위해 무조건적인 희생으로 산다. 크면서 장희선은 그것이 좋아보이기보다는 짜증이 났다.
그렇다고 가게 때문에 할머니에게 맡기고 늘 집을 비우는 엄마가 좋은 것도 아니다. 어릴 때부터 그는 할머니가 엄마의 성격과 행동을 헐뜯는 소리를 들었다. 할머니는 걸핏하면 "에미 딸 아니랄까봐. 어쩌면 그렇게 똑같니" 라고 말한다.
할머니의 욕이 아니더라도 그는 엄마의 성격이 싫었다. 엄마와 닮은 자신의 성격이 싫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가족이 함께 살면서 마주칠 때마다 "이년아, 살 빼. 저게 사람이야. 괴물이지" 라는 말만 하는 엄마가 싫었다.
엄마는 1995년 이화여대 사회생활학과를 졸업하고 영화를 한답시고 집에서 빈둥거리며 먹기만 해 뚱뚱해지는 딸(장희선)이 불만스럽다.
출퇴근하고, 월급받는 직장에 취직해 시집 가기를 바란다. 그런 딸이 어느날 영화를 찍는다며 엄마에게 카메라를 들이댔다. '무슨 영화인가' 했더니 엄마와 할머니 이야기였다. 그 때 엄마의 반응.
"아이구 이게 영화야? 안 해. 좀 멋있는 이야기를 찍어라. 이게 뭐냐" 는 엄마의 부정적 반응. 딸은 엄마를 졸랐다. 그러자 엄마는 딸에게 조건을 걸었다. "끝나고 10kg쯤 빼서 선 본다고 약속하면 찍지."
장희선의 54분짜리 16mm 독립영화 '고추말리기' (1999년)는 이렇게 해서 시작됐다. 감독은 평소 할머니와 엄마의 말투와 내용을 그대로 담으려 현장에서 자연스럽게 대사를 만들고, 비디오 카메라로 인터뷰도 따고, 메이킹 필름도 찍었다.
현장이라야 감독의 아파트와 옥상이 고작이다. 연극배우 박준면에게 영화 속 감독 자신의 역할을 맡겼지만, 감독이 직접 출연해 대화도 나누고 인터뷰도 했다.
카메라 앞에서 엄마는 천연덕스럽게 딸을 욕하고, 할머니는 "내가 이 집 파출부야?"라며 카메라야 있건 말건 불만을 터뜨린다.
엄마는 침대에 딸과 함께 누워 시어미니에 대한 불만을 늘어놓고, 엄마로서 딸에 대한 미안한 마음도 이야기한다.
16mm필름과 디지털 비디오, 아마추어 연기냄새가 강한 극영화와 다큐멘터리(인터뷰, 메이킬 필름)가 뒤섞인 '고추말리기' 에 특별한 것이라고는 없다.
늦여름 고추말리기를 하는 3대의 일상과 대화를 따뜻하고 솔직하게 담은 아주 개인적인 가족영상일기에 가깝다.
그 일기는 마지막 셋이 함께 고추말리기를 끝내는 '이해' 의 따뜻한 모습으로 끝난다. 장희선 감독 역시 "가족 안에서의 할머니와 엄마와 나를 살펴보면서 각각의 모습을 사랑하게 됐다" 고 한다. 10일 광화문 씨네큐브에서 개봉.
할머니와 엄마와 '고추말리기'를 하는 장희선 감독(가운데).
이대현 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