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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예약 부도낸 오리구이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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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예약 부도낸 오리구이집

입력
2001.02.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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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처럼 보신 음식이 다양하게 발달된 나라도 드물 것이다. 개고기는 기본이고 지렁이나 벌레도 마다 않는다.창의력도 뛰어나 비위 약한 사람에게는 뱀을 먹인 닭을 제공하고, 최근에는 유황을 먹고 자란 오리를 파는 집이 많이 생겼다.

사람을 위한 닭과 오리의 희생이 얼마나 가치가 있는지 궁금해 지난 일요일 동네에 있는 제법 규모가 큰 유황오리구이집에 갔었다.

오리구이는 3시간 정도 걸리기 때문에 보통 예약을 한다. 우리 가족도 예약 시간에 도착해 기대에 부풀어 기다렸는데 한 시간이 다 지나도록 무소식이다.

종업원을 불렀더니 오리 굽는데 시간이 걸린다고 둘러댄다. 차라리 예약 안한 손님이 몰려 예약 분까지 미리 팔아 버렸다고 솔직히 시인했다면 덜 서운했을 것이다.

신뢰가 없는 사회는 경제적으로 성숙하기 힘들다. 식당 주인은 예약을 안 지킬지 모른다는 불확실성을 피해 확실한 이익을 택했겠지만, 배반당한 사람은 앞으로 예약이라는 거래질서에 대한 믿음이 줄어들 것이다.

경제가 제대로 되려면 일단 모두의 몫이 커지고 나아가 분배가 형평 해야 한다. 그런데 누군가가 부당한 방식으로 제 몫을 더 챙기면 규칙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게 되고 거래질서가 흔들린다. 자연 보편적인 믿음에 따르는 거래가 위축되고 이는 전체소득의 감소로 이어질 수 있다.

시장경제가 다른 체제에 비해 우월한 결정적인 이유는 상대적으로 '게임의 법칙'이 공정하다는 것이다.

인위적으로 자원을 배분하는 경우 부분적으로는 우월한 효과가 나타날 수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왜곡효과가 클 수 있다. 자원배분의 힘을 가진 자에게 오판의 가능성과 부패의 유혹이 함께하기 쉽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장 경제에서는 주어진 제도와 가격이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이러한 규칙 변수가 안정적으로 지속된다는 믿음만 있다면 경제 주체들이 굳이 남 눈치 볼 이유가 없다. 그래서 신뢰가 높은 사회일수록 시장의 힘이 커진다는 얘기가 나오는 것이다.

반면 신뢰가 부족한 사회에서는 보편적인 규칙보다는 확실한 담보에 근거한 거래가 중심이 된다.

아마 오리구이집 주인도 내가 친척이었거나 평소의 단골이었으면 안심하고 내 오리를 남겨 놓았을 것이다. 반면 불특정다수의 한 명으로서 내가 한 약속은 덜 미더웠을 것이다.

거래질서에 대한 신뢰가 부족할 수록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 보다는 혈연이나 지연과 같은 '믿을만한 관계'가 경제의 큰 흐름을 좌우하기 쉽다.

시장이 작고 미성숙할 때는 이처럼 거래의 불확실성을 사전적으로 차단하는 방식이 효과를 볼 수 있지만, 경제규모가 커지고 신용거래가 주류를 이루게 되면 보편적인 규칙의 중요성이 더욱 커진다.

현 정부가 국정지침으로 시장경제를 내세우며 지역감정 해소와 재벌의 족벌체제 개혁을 강조한 것은 바람직한 포석이었다.

믿을 만한 사람들끼리 모여 일하는 것은 좋지만 신뢰의 조건이 지연이나 혈연이 된다는 것은 시장논리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역감정의 해소가 '지역배분의 균형'으로 해석되고, 재벌개혁도 공정한 거래 규칙을 위한 제도개혁 보다는 정부의 직접개입이 우선시되면서 시장경제에 도움을 주는 신뢰향상은 크게 진전되지 않았다.

정권 후반기에 웬 맥없는 처방이냐 하겠지만 장기적으로 현 정부가 긍정적인 평가를 받기 위해서는 신뢰사회와 시장경제 구축을 위한 제도와 관행의 정립에 힘을 더 쏟아야 한다.

가시적인 성과에 급급해 정부 스스로 규칙과 약속을 어기는 일은 더 더욱 삼가야 한다. 오리구이집 입구에 큼직하게 나붙은 사장님 사진을 보며 신뢰는 위에서 유도되는 것이 아니라, 아래에서 형성되는 것이라는 생각이 떠오른다.

전주성ㆍ이화여대 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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