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후드 바라크(59) 이스라엘 총리에게 6일은 생애 첫 패배의 순간이었다. 17세에 군에 들어가 서른이 되기 전에 사령관에 오르고 정치 입문 4년 만에 총리로 도약한 그의 사전에 패배란 없었다.1942년 동유럽계 키부츠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바라크는 67년 6일 전쟁, 73년 속죄일(욤 키푸르)전쟁 등 이스라엘의 모든 전쟁에 참전한 '움직이는 영웅'이었다. 72년 벨기에 항공 피랍사건에서 인질들을 감쪽같이 구출했었고 76년 뮌헨올림픽에서 '검은 9월단'을 제압하는 등 바라크는 이스라엘군의 '해결사'였다.
군복을 벗은 바라크는 열렬한 평화주의자로 변신했다. 99년 '용감한 자의 평화'를 내세우며 집권한 그는 레바논 철군 공약을 이행하고 팔레스타인 및 시리아와 평화협상을 적극 추진했다. '이스라엘은 평화와 안보를 위해 양보할 수 있을 만큼 강하다'는 게 그의 논리였다.
하지만 그의 '평화 실험'은 2년도 채 안돼 실패했다. 혼신을 기울였던 팔레스타인과의 캠프 데이비드 협상은 거꾸로 참혹한 유혈분쟁으로 귀결됐다. 강경 우파들은 그를 예루살렘을 양보하려는 '반역자'로 몰아붙였고 온건파들도 고비마다 우유부단한 그에게 등을 돌렸다. 분석가들은 군대와는 달리 설득이 필요한 현실정치에 적응하지 못한 것이 바라크의 실패 요인이라고 지적한다.
그러나 그를 '실패한 정치인'으로 결론 내리기에는 아직 이르다. 바라크는 선거패배 후 노동당 당수직과 의원직 사임 의사를 밝혔지만, 샤론이 연립내각 구성에 실패할 가능성 등 복잡한 변수들이 여전히 남아있다. 기회만 주어지면 바라크는 히브리어로 '번개'를 뜻하는 자신의 이름처럼 눈깜짝할 사이에 정계로 돌아올 것이다.
이동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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