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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세이 유라시아 천년] (18)역참제, 유라시아를 연결한 유목교통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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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세이 유라시아 천년] (18)역참제, 유라시아를 연결한 유목교통망

입력
2001.02.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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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의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어떤 사람이 손에는 전화기를 들고 모자에는 무엇이라고 써붙인 채 돌아다니고 있었다.어떤 여자가 그에게 다가가더니 수화기를 들고는 전화를 하는 것이 아닌가. 통화를 마친 뒤 여자는 그에게 돈을 지불하고 유유히 제 갈 길을 갔다. 우리 일행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일제히 소리질렀다. "공중전화!"

그렇다. 그것은 '이동식 공중전화', 아니 몽골인다운 '유목식 공중전화'였던 것이다. 통신 발달이 지체되어 거리 곳곳에 공중전화가 있는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모두 휴대폰을 살만한 처지도 아니니 충분히 이해가 갔다.

그러고 보면 텐트에서 살며 이동생활을 하는 몽골인들이 우리처럼 집에 전화기를 설치하기도 어려울테니 앞으로 휴대폰이 보편화하면 얼마나 편리해질까.

더구나 초원의 연속이니 기지국 몇 개만 세워도 엄청나게 넓은 지역을 커버할 수 있지 않겠는가. 말을 타고 달리며 휴대폰으로 다른 곳에서 유목하는 가족에게 전화하는 몽골인. 생각만해도 신이 난다.

이처럼 몽골초원과 같은 특수한 지리적인 조건 아래에서는 농경민이 도저히 상상하기 어려운 상황들이 생겨난다. 그 중의 하나가 '길'이다.

울란바토르와 같은 큰 도시, 혹은 이들 도시를 연결하는 간선도로들을 제외하고는, 우리가 생각하듯이 특별히 정비된 길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

대체로 차나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다른 길로도 얼마든지 갈 수 있다. 말을 타고 다니던 과거에는 더 그러했을 것이다.

몽골인들에게 '길'의 개념이 희박하다는 것은 주소를 통해서도 잘 드러난다. 우리가 이동식 텐트에 사는 어떤 몽골인 친구에게 편지를 쓴다고 가정해보자.

편지 겉봉에 무엇이라고 주소를 쓸 것인가. 도로의 이름이나 번지수를 댈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이 문제가 궁금해서 한 번은 몽골의 학자에게 물어보았더니 'xx군 xx면 아무개'라고 쓰면 들어간다는 것이다.

교통은 길을 전제로 한다. 도로망이 없는 교통은 생각하기 어렵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라는 유명한 말도 있지만, 이는 사실 로마제국의 도로망이 얼마나 잘 정비되어 있었는가를 말해 주는 것이다.

고대 페르시아 제국은 지중해에서 수도까지 연결하는 '제왕의 길'을 건설하기도 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거대한 제국들이 도로망을 정비했던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렇다면 몽골제국도 이 점에서 예외일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몽골인들은 '길'의 개념이 희박했던 유목민이었다. 과연 이들이 유라시아 대륙을 정복하고 역사상 전무후무한 대제국을 건설했을 때 제국의 각 부분을 어떻게 연결했을까.

초원 깊숙한 곳에 위치한 제국의 수도로부터 북경까지는 1,500㎞, 타슈켄트까지는 3,000㎞, 바그다드나 모스크바까지는 5,000㎞나 떨어져 있었다.

후일 수도는 현재의 베이징(北京) 부근 즉 제국의 동쪽 끝으로 옮겨졌으니 다른 지역과의 교통은 더욱 힘들어진 셈이다.

당시의 기록에 따르면 제국의 동쪽 끝에서 서쪽 끝까지 가는데 말을 타고 아무리 빨리 달려도 최소한 200일이 걸릴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데도 당시 몽골인들이 열심히 도로를 건설했다는 기록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물론 기존의 도로를 정비하고 보수한 흔적은 있지만 단편적인 것에 불과했다.

도로 주변에 가로수를 심는다든가 도적떼의 출몰을 막는다든가 하는 것이지, 제국의 역량을 기울여 체계적인 도로망을 건설했다는 기록은 없다.

흥미롭게도 제국의 교통을 위해 그들이 건설했던 것은 도로가 아니라 역참이었다. 칭기즈칸의 뒤를 이어 제2대 군주가 된 우구데이는 자신의 3대 치적 가운데 하나로 역참제의 확립을 꼽을 정도였다.

엄청나게 확대된 제국의 각 지점에서 자신의 수도가 있는 카라코룸까지 신속하게 교통이 가능할 수 있도록, 중요한 노선을 따라 일정한 간격으로 역참을 배치한 것이다.

이 역참을 몽골어로는 '잠(jam)'이라고 불렀는데 여기에는 간단한 숙박시설, 수레나 말, 필요한 식량 등이 준비되어 있었고, '잠치(jamchi)'라 불리는 관리인이 운영했다.

물론 요즈음의 여관처럼 아무나 돈을 내면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국가의 공무로 여행하는 전령이나 관리 혹은 외국의 사신들에게만 사용이 허가되었고, 이들은 반드시 패자(牌子)라는 증명을 보여야만 했다.

몽골인들은 중국과 중동 그리고 러시아를 정복한 뒤 이들 지역에 대해서도 역참제를 광범위하게 확대해 나갔다.

현재 몽골제국 전역에 얼마나 많은 수의 역참이 설치되어 있었는지를 알려주는 자료는 없다. 다만 중국 안에 둔 기록만 남아 있는데, 이에 의하면 역참의 숫자가 1519개소에 이르렀고 그곳에 비치된 말과 노새가 5만마리, 소가 9,000마리, 수레가 4,000량, 배가 6,000척을 헤아렸다고 한다.

오늘날 중국에서는 정거장을 '짠'이라고 부르고 한자로는 站(참)이라고 표기하는데, 실제로 이 말은 바로 몽골어 '잠'에서 기원한 것으로 원대에 이처럼 많은 '잠'이 두어졌기 때문에 중국어로 차입된 것이다.

몽골제국의 역참제는 동방을 방문했던 유럽인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겼던 것 같다. 13세기 후반 몽골 지배하의 중국을 방문했던 마르코 폴로는 이를 '얌(iamb)'이라고 부르면서 도로를 따라 25마일이나 30마일에 하나씩 설치된 "매우 크고 멋있는 숙사"는 물론, "도로에서 벗어나 집도 숙박소도 찾아볼 수 없는" 즉 초원이나 사막에도 "마찬가지로 숙사와 말과 마구 등 모든 물건들"이 갖추어져 있는 '잠'이 배치되어 있었다고 적고 있다.

마르코 폴로와 거의 같은 시기에 몽골의 대칸을 찾아갔던 교황의 사신들은 실제로 이 '잠'을 이용하여 신속하게 여행할 수 있었고, 이것이 얼마나 효율적으로 운영되고 있었는지에 대해 한 입으로 증언하고 있다.

몽골인들이 만들어낸 이러한 역참제도는 표면상으로는 다른 제국들이 실시했던 역참제도와 유사해 보일지도 모른다.

사실 중국에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역참제를 실시했고 패부(牌符)를 발행했다. 그러나 몽골제국의 역참제와 다른 중국왕조의 역참제는 근본적인 차이점을 지니고 있다.

후자의 경우 기본적으로 도로를 전제로 성립한 것이고 역참은 도로망의 효율적인 이용을 위해 고안된 것에 불과한 것인 반면, 전자의 경우에는 원래 도로가 존재하지 않는 초원에서 처음 도입된 것이기 때문에 도로는 이차적인 중요성 밖에 지니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다른 국가의 역참제가 도로를 근간으로 한 '선(線)의 체제'였다면, 몽골제국의 역참제는 도로가 존재하는 농경지역은 물론 도로가 존재하지 않는 사막과 초원까지도 포함하는 '점(點)의 체제'였던 것이다.

몽골인들이 만들어낸 이 체제는 상황의 변화에 적응할 수 있는 유연성을 지니고 있었다. 예를 들어 어느 지역에 전쟁이 벌어졌을 경우 그곳을 피해 우회하는 곳에 역참들을 배치함으로써 새로운 교통망을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이다.

몽골인들은 자신의 독특한 유목적 환경에서 생겨나온 역참제를 통해 거대한 제국을 연결하는 교통망을 확립할 수 있었다.

이런 점에서 이 제도는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21세기의 기술과 정보혁명을 주도하는 인터넷과 이동통신이야말로 '점의 체제'의 현대적 구현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우리는 말과 활이 아니라 휴대폰과 노트북으로 무장한 현대적 유목민이 아닐까?

김호동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후원 삼성전자

■"상부상조는 몽골의 자랑"

몽골을 여행할 때 러시아제 푸르동자동차가 두 번이나 고장이 났다. 먼저 울란바토르에서 카라코룸으로 가는 길에 팬벨트가 끊어졌다.

초원과 울퉁불퉁한 찻길 밖에 없는 곳. 걱정이 이만 저만 아니었다. 순간 뒤에서 달려오던 차가 멈춰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사정을 말하자 "도와줘야 하는데 ."라고 미안해 하며 떠났다. 곧 다른 차가 다가와 멈췄다. 우리 사정을 들은 운전자가 차 트렁크에서 팬벨트 하나를 꺼내 건네 주었다.

또 체체를렉에서 카라코룸으로 돌아오는 길에 타이어가 펑크 났다. 역시 초원 뿐인 곳.

타이어와 휠을 분리하고 튜브를 떼어낸 뒤 땜질을 하고 다시 바람을 넣고 타이어를 씌우는 힘든 작업을 해야 했다.

운전사 누르지트(31)가 이 일을 하느라 끙끙거리는 순간 근처에 있던 마을 주민 7~8명이 몰려왔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땀을 뻘뻘 흘리며 거들었다.

이들 중에는 나이 60을 넘긴 노인도 여럿이었다. 심지어 우리 일행과 동행했던 몽골 국립과학아카데미 역사연구소의 아요다이 오치르(53)소장도 동참했다. 나이와 직업, 신분을 떠나 내 일처럼 거드는 모습이었다.

현지서 만난 한국인들은 "몽골의 가장 큰 자랑은 상부상조하는 모습"이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몽골은 인구(270만명)가 워낙 적기 때문에 이리 저리 연결하면 누구나 친척, 친구가 된다.

어려움에 처한 이를 외면하면 나쁜 사람으로 금방 입방아에 오른다. 무엇보다도 초원과 사막이라는 혹독한 자연조건 때문에 서로 돕지 않으면 살기 어렵다는 것을 몽골 사람 스스로 잘 알고 있다. 글

박광희기자 kh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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