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 (최고경영인)가 싫어요."최근 서울에 본사를 둔 한 중견기업에서는 총수가 한 고위 임원에게 대표이사 사장직을 맡으라고 요청했으나 이를 거부, 젊은 임원이 대신 기용되는 해프닝이 일어났다.
기업 재무구조가 부실한데다 대표이사 사장직을 맡을 경우 경영판단에 대한 책임은 물론, 법적 책임까지 지게 될 것을 두려워했다는 후문이다.
또 최근에는 H그룹 계열사 부사장이던 한 임원이 회사에 대한 개인지급보증을 섰다가 재산압류가 들어오자 자신의 아파트에서 투신자살을 하는 사건도 있었다. 이 임원은 그룹이 부도가 나면서 재산압류가 들어오자 그룹 회장에게 이를 해결해줄 것을 요구했다가 거절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기업 임원들이 CEO 직을 고사하는 등 몸을 사리고 있다. CEO 라는 명예와 막강한 권한이 싫을 리 없지만 만의 하나 자신에게 돌아올 책임과 부담이 두렵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경영에 실패할 경우 손을 털고 직장을 떠나면 그만이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대우그룹의 전직 사장단처럼 인신구속은 물론, 평생 모은 재산마저도 날릴 수 있다. 더욱이 기업이나 은행 임원에 대한 소액주주의 수백억원대 민ㆍ형사 소송이 끊이지 않는다. 덕분에 일부 대기업들은 CEO 등 임원진을 위해 손해배상책임보험에 가입해 놓고 있다. 삼성의 경우 이건희(李健熙) 회장을 비롯, 삼성전자 CEO와 이사들까지 총 1,000억원에 달하는 '이사손해배상책임보험'에 가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임원급 인사를 관리해온 한 헤드헌터사의 관계자는 "기업에서 임원과 CEO 인사들에 대한 리스트 요구가 많아졌다"며 "그러나 당사자들이 기업 재무상태에 대한 정밀 자료를 요구하는데다 워크아웃이나 화의기업의 경우 대폭적인 위험수당을 요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편 대우그룹의 전직 사장단이 줄줄이 사법처리 되면서 재벌 총수와 전문경영인 간 새로운 위상정립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대우그룹의 한 전직 임원은 "회사가 김우중 전 회장의 명령대로만 움직였을 뿐 전문경영인들 조차 반대 의견을 거의 개진하지 못했다"며 "몇 차례 김 전 회장이 무리한 결정을 내리면서 결국 그룹이 벼랑으로 몰리게 됐다"고 고백했다.
의사결정 권한이 총수 한 명에게 과도하게 집중, '견제와 균형'의 원칙이 깨지면서 몰락의 길을 걸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건실한 기업경영을 펼쳐나가기 위해서는 전문경영인의 한계와 책임이 명확해야 하고 이를 규정하는 법적ㆍ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대기업의 한 임원은 "국제통화기금(IMF)체제 이후 상당부분 개혁이 되었지만 총수의 말 한마디에 전문경영인이 꼼짝 못하는 풍토는 여전하다"며 "소액주주와 시민단체, 시장이 지켜보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전문경영인의 권한이 점차 강화할 것으로 본다"고 낙관했다.
좌승희 한국경제연구원장은 "과거 재벌기업의 문제는 총수 한 사람이 전권을 휘둘렀다는 것에서 출발했다"며 "총수가 유능한 전문경영인에게 권한과 책임을 대폭 위임하지 않을 경우 시장이 등을 돌릴 수 있다"고 말했다.
조재우기자
josus62@hk.co.kr
장학만기자
loca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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