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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의 글과책] 문화권간의 만남과 교배추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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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의 글과책] 문화권간의 만남과 교배추구

입력
2001.02.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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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년간 문화 저널 '흔적'이 창간됐다. 문화과학사 펴냄. '흔적'은 여러 언어권의 편집자들이 함께 편집해 비슷한 시기에 출간하는 다언어(多言語) 잡지다.일본어판은 '토레이시즈'라는 제호로 지난해 10월 이와나미 출판사에서 창간호가 나왔고, 영어판은 'Traces'라는 제호로 미국 코넬 대학 출판부에서 곧 나올 예정이다. 중국어판과 독일어판도 준비되고 있다.

'흔적'의 편집에는 동인 48명과 고문 25명이 간여하고 있다. 중국의 왕샤오밍(王曉明), 이탈리아의 안토니오 네그리, 영국의 피터 오스본, 미국의 디페쉬 차크라바르티, 한국의 강내희 같은 이들이 편집 동인들이고,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데리다, 일본의 문화이론가 가라타니 고진 같은 이들이 편집 고문으로 이름을 올렸다.

편집 동인의 한 사람인 미국 코넬 대학 교수 나오키 사카이가 쓴 창간호 서문은 '흔적'의 향후 작업을 '비교론적 문화 이론'으로 요약하고 있다.

그런데 비교에 선행하고 비교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번역이다. 그래서 '흔적'의 기획은 불가피하게 번역을 중심에 둘 것이라고 서문은 말한다.

창간호의 주제가 '서구의 유령들과 번역의 정치'가 된 것은 그래서 자연스럽다. 그러나 제2호와 제3호의 주제가 각각 '인종 공포와 이주의 기억''근대성의 충격'으로 잡혀져 있는 것을 보면, '흔적'이 탐색할 '번역'은 좁은 의미의 번역이라기보다는 문화권들 사이의 만남과 교배라는 넓은 의미를 지닌 듯하다.

창간호에 실린 왕샤오밍의 '번역의 정치학--1980년대 중국 대륙의 번역 운동'은 그 글이 보고하는 그 시기의 중국 상황이 같은 시기 한국에서의 번역 열풍과 비교되어 흥미롭다.

1978년에서 1987년까지 중국에서는 기존의 '번역계'에 속하지 않은 젊은 아마추어 번역가들이 속도 제일주의로 5,000 종 이상의 인문사회과학 서적을 번역ㆍ출간했는데, 그 대부분이 미국과 서유럽에서 나온 책들이었고 그 가운데서도 마르크스주의 저작은 매우 드물었다.

졸속 번역과 집단 번역을 당연시하던 그 시기의 중국 풍경은 거기 견줄 만한 조급함으로 마르크스-레닌주의 서적을 번역해대던 80년대 한국의 풍경과 겹친다.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가라타니 고진이 기고한 글은 세 페이지가 채 못 되는 짧은 글이지만, 기발한 착상을 담고 있다.

그는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관료 지배로 변질된 경과를 짧게 서술한 뒤에, 관료제의 권력 집중을 막기 위한 방책으로 추첨제를 제안한다.

구체적으로, 무기명 투표로 뽑은 복수 후보자 가운데 추첨으로 대표자를 뽑는 방식이다. 그러면 마지막 단계가 우연성에 의거하기 때문에 파벌적 대립이나 후계자 투쟁은 의미가 없어진다는 것이다.

의회 민주주의가 부르주아 독재라면 추첨제야말로 프롤레타리아 독재라고 가라타니는 단언한다. 권력의 폐해는 권력이 집중하는 자리에 우연성(추첨제)을 도입함으로써 막을 수 있다는 그의 발상에는 그저 웃어넘기기 어려운 지혜가 담긴 듯도 하다.

편집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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