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간 흥분하면서 그를 만나러 갔다. 黃溫順씨다. 1900년 쥐띠쌩이니 올해 백 한 살이다. 하지만 그는 지금도 현역이다.학교법인 휘경학원재단이사장을 맡고 있으며, 1951년 설립된 한국보육원의 명예원장이다. 설립이후 내내 원장으로 직접 운영하면서 고아들을 돌보다 1월초 명예훈장으로 일선에서는 물러났다.
'백 한 살의 현역이라니, 아흔도 아닌 백수를 넘은 할머니가 아직도 사회활동을 하고 있다니!' 그를 만나러 가는 길이 흥분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거의 매일 아침 9시쯤이면 서울 중구 신당동 집을 나서 청량리 밖
휘경여중고를 거쳐 경기 고양시 장흥에 있는 한국보육원을 둘러본다. 자동차에 타고 내릴 때 부축을 받아야 하지만 백수가 넘은 나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정정하다.
청력이 약해 큰 소리로 말해야만 들을 수 있고, 간혹 했던 말을 되풀이하는 일이 늘어나고는 있지만 그리 피곤하지 않으면 신문이나 불경을 소리 내어 읽는다.
며칠 전에는 외국손님에게 영어로 인사를 나누기도 했고, 지난 달 30일 그 손님이 경희대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던 자리에서는 인사를 해달라는 부탁을 받자 바로 일어나 수십년 전의 기억을 되살리면서 옛날 이야기를 털어놓기도 했다.
그가 하객들에게 한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여기 조영식 경희대 학원장님하고 나 하고 옛날에 내기를 한 적이 있어.
나는 휘경학교를 하고 있을 때고, 조 이사장님은 경희대 총장을 하실 때인데 서로 '나중에 누가 더 훌륭한 학교를 만드는가 내기하자고 한 것이지.
그런데 지금 봐요. 누가 봐도 경희대가 더 훌륭해졌잖아. 남자여서 큰 일을 했다고도 하겠지만 그게 아닙니다.
큰 꿈을 가지셨으니 큰 일을 해내신 거에요‥." 백 한 살의 노인이 한 즉흥연설이 이렇게 훌륭할 수 있을까. 박수소리는 오래 계속되었다.
그는 맏사위 오흥근(吳興根ㆍ71ㆍ전 경제기획원 통계국장)씨와 함께 살고 있다. 남편과는 오래 전에 사별했고 1남2녀중 아들은 한국전쟁 때 잃었다.
맏딸도 10여년 전에 사망했고 하나 뿐인 외손도 결혼해 나가서 산다. 둘째 딸은 미국으로 이민 간지 오래다.
덩그런 집에서 장모 사위 두 노인만 돕는 사람을 두고 쓸쓸히 살고 있다.
그러나 그는 아들 딸이 7,000명이 넘는다. 50년 동안 한국보육원을 운영하면서 그를 '어머니'라고 불렀던 고아들이다. 보육원을 떠나 가정을 이룬 아들 딸의 아들 딸까지 합하면 수 만명의 '할머니'이기도 할 것이다.
한국보육원은 초대대통령 이승만 박사의 지시로 1951년 제주도에서 설립됐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고아수용기관이었던 서울시립양육원 원생 900여명이 인천부두에서 피란길을 찾으며 추위와 굶주림에 떨다가 헤스와 블레이즈델이라는 두 미군 대령의 도움으로 제주도로 긴급공수 된 것은 60년대 초반 록 허드슨 주연의 '전송가'라는 영화를 통해 전세계에 알려졌던 사실이다.
이 박사는 제주도에 도착한 고아들을 보호하기 위해 한국보육원을 설립토록하고 그에게 원장을 맡겼다.
열 아홉이 되도록 곱게 키워낸 외아들을 전쟁 중에 잃고 오열과 실신을 거듭하던 그는 '한 아들을 잃은 대신 천의 아들을 키워보라'는 이 박사의 당부를 받아들였다.
(앞에서 말한 외국손님이 블레이즈델 대령이다. 그는 한국보육원 원아들을 만나러 오랜만에 한국을 방문한 터였다.) 그가 이 박사와 인연을 맺은 것은 자신이 살고 있던 집을 이 박사에게 헌납하면서부터.
동대문 앞 커다란 집에서 살고 있던 그는 해방 후 환국한 이 박사가 거처를 찾으면서 자신의 집을 마음에 두는 것 같다는 말을 듣곤 집을 내놓았다. 당시의 민족지도자에 대한 최고의 경모(敬慕)에서 였을 것이다. 그 집에는 이화장이라는 이름이 붙어졌다.
한국보육원 이전부터 그는 고아원을 운영하고 있었다. 해방 직후인 1946년에 이미 서울 한남동에서 보화원(普和園)이란 고아원을 운영하면서 40여명의 고아를 돌봤다.
이화여전 보육과를 졸업하던 해인 1926년부터 몇 년 간은 서울 관수동의 한 유치원 교사를 지냈으니 아이들과의 인연은 70년이 넘는다.
그는 황해도 연안에서 태어났다. 빈한한 집안 출신인 그의 부친은 이재에 밝아 당대에 부를 쌓았다.
인천에 갔다가 사기그릇을 처음 본 그의 부친은 값비싼 놋쇠 그릇 아니면 싸지만 투박한 뚝배기 밖에 없던 연안에 처음으로 사기그릇을 들여와 팔았으며 솜틀기계와 재봉틀을 도입해 솜조끼를 만들어 팔면서 거부가 되었다.
그러나 그의 부친은 졸부는 아니었다. 거지들도 집에 불러 밥을 먹이곤 했던 그의 부친은 어느 날 딸이 거지들이 먹던 숟가락을 따로 씻어 보관하는 걸 보고 '사람은 모두 똑 같다.
부모가 없어서 거지가 된 사람들인데 차별해서 되느냐'며 크게 꾸짖었다. 그가 수십년 간 부모 없는 아이들을 돌보고 없는 자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게 된 건 부친의 이런 가르침이 큰 바탕이 되었다.
별세한 그의 부친은 그에게 자비심과 동정심만 가르친 건 아니었다. 그는 부친으로부터 이재도 배웠다. 1928년에 결혼한 후 얼마 안 지나면서부터 부친의 유산과 남편이 벌어온 돈으로 많은 땅을 사들였다.
(그의 부친은 1918년 병으로 급사했으며, 어머니는 이듬해 일어났던 3ㆍ1운동때 태극기를 만들어 나눠주고 만세운동 주동자들 사이의 비밀연락을 맡았다는 이유로 구속됐다 풀려났다.
그는 이때가 가장 어려웠다고 술회하곤 했다.) 이화장 자리는 1931년에 산 것이며 3년 뒤에는 경기 고양군 장흥 일대의 야산 수만 평을 사들여 별장도 두었다.
지금의 이대 동대문병원터도 그의 땅이었다. 휘경여중고 자리는 1954년에 사들였다. 땅을 사들이는 한편 1937년에는 서울 종로 네거리에 순천상회라는 주단가게를 열었다.
이미 조선의 대표적 주단가게들이 번창하고 있었지만 비단 한 마를 달라면 한 마 한 치를 주는 그의 영업방침은 이내 수 많은 단골을 만들어냈다.
그의 종교는 원불교다. 젊은 시절 금강산에 들렸다가 불교에 접하게 되고 이어 원불교의 가르침에 빠져들어 그 때까지 다녔던 교회를 떠났다.
그는 "기독교는 박애정신을 가르치는데 불교는 인연을 강조하잖아? 그게 마음에 들었던 것 같아"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 무렵 그는 자세하게는 털어놓지는 않았지만 가정문제로 오랫동안 속을 썩혔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런 사정에서 '인생은 공수래 공수거이며, 모든 건 전생의 인연'이라는 불교의 가르침이 깊숙이 다가왔다는 말이었을 것이다.
외아들을 잃은 대신 수천명 남의 아이들을 돌보게 된 것이나 그 일을 위해 벌어온 돈을 쓴 것도 그 가르침 때문이라고 밝힌 적도 여러 번이다.
장흥의 지금 보육원 자리는 그가 아들을 잃은 곳이다. 전쟁 때 백범 김구선생의 손자 등과 이곳에 피해있던 열 아홉 난 그의 아들은 인민군에게 끌려갔다는 주민들의 이야기만 전해질 뿐 생사조차 알 수 없었다.
아들이 세 살 때 사놓은 이 곳에서 아들을 잃어버릴 줄, 또 아들을 잃어버린 이곳에 고아원을 차려 고아들을 돌보게 될 줄 누가 알 수 있었을까. 그는 그런 모든 것을 전생의 인연이라는 말로 설명해왔다.
지금도 거의 매일 장흥 보육원을 찾아 나서는 것에 대해 그의 사위와 주변 사람들은 '아들을 찾으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사실 그의 일생을 옮겨 쓰기 위해서만 그를 만나려 했던 건 아니다. 그것보다는 무엇이 그를 남을 돕는 사람으로 만들었는지, 그렇게 살아온 자신의 삶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물어보려 했다.
또 종교는 그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직접 묻고 들으면서 생각해보고 싶었다. 그를 만나러 가면서 흥분한 것도 백 살이 넘은 사회사업가의 '속마음'을 정리하는 유일한 기자가 될 수도 있겠다는 욕심 때문이었다.
그래서 예전 신문철에서 그에 관한 기사를 찾아내 그가 했다는 '좋은 말' 몇 가지를 적어가 그 뜻을 다시 확인해보려 했다.
예를 들면 '남을 돕는 사람을 하나라도 더 키우는 게 소원이라고 했다는데 그게 이뤄졌다고 보는 건지''주는 것이 낙이라고 했는데 그 쉽지 않은 일을 어떻게 그렇게 평생 해올 수 있었는지''한국에서 고아원을 없애기 위해 고아원을 한다고 한 말의 뜻은 무엇이었는지''원불교의 가르침 중 정말 소중하게 생각하는 건 무엇인지'등 10여가지 질문을 적어 간 것이다.
가는 귀 때문에 말을 잘 못 알아듣는 그에게 이건 읽으실 수 있느냐며 질문서를 건넸다.
신문활자보다 약간 큰 글씨였다.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질문서를 몇 번 되풀이해 읽던 그는 갑자기 "이건 거짓말이야. 나는 이런 말한 적이 없어"라고 말했다.
"어떤 게 거짓말이란 말입니까"라고 급하게 물었지만 답이 없었다. 대신 잃어버린 아들 이야기, 이화장 땅 살 때 이야기, 열 세 살 때 입학한 이화여전 이야기, 주단가게를 하면서 돈 벌던 이야기 등을 시작했다.
노쇠 때문인 것 같기도 하고, 대답하기 싫어서 인 것 같기도 했다. 흥분은 금세 가라앉고 안타까워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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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박서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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