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한 권이 오랜 세월을 견디고도 신선함을 잃지 않는다면 일단은 고전으로서 필요조건은 지녔다는 뜻이다.1937년에 나온 '반 룬의 예술사 이야기'(들녘 발행)는 이런 맥락에서 고전의 반열에 들 만하다. 유명 화가의 그림만 꽉 찬 예술사 서적에 싫증난 독자라면 밤을 새워서라도 읽게 만드는 마력이 있는 책이다.
헨드릭 반 룬(1882~1944)은 독일 뮌헨대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AP통신 워싱턴ㆍ바르샤바ㆍ모스크바 특파원을 지낸 사람이다. 탁월한 문화사가로서 박학한 지식과 뛰어난 안목을 지녔다.
19세기 이래 미술사학계를 풍미해 온, 예술사는 예술이 내면적 완성도를 끊임없이 높여가는 과정이라는 형식주의 사관을 스스럼없이 내버린 선구자적 용기도 가졌다.
그는 예술사를 당대 사회의 발전과 연계하는 관점을 제시했다. "예술가는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주제를, 자기 시대에 가장 알맞다고 보는 방법으로 표현하는 집단"이라는 게 그의 기본 시각이다.
예를 들어 현대 건축가가 1237년의 양식으로 작업한다면 그것은 형편없는 모방일 뿐이며, 12세기 후반 고딕양식은 엄연한 그 시대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이는 바로 1970년대 이후 등장한 신(新) 미술사학의 기본 입장이기도 하다.
1,000페이지가 넘는 분량에 3권으로 나뉘어 출간된 책은 통시적으로 구성됐다. 큰 줄기만 잡아본다면 선사시대 이집트 그리스 비잔틴 이슬람 로마네스크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 로코코 낭만주의 19세기말 순이다. 미국과 일본 인도 중국의 예술사적 변천도 빼놓지 않았다.
1879년 네 살짜리 여자아이가 우연히 스페인 알타미라 동굴벽화를 발견한 에피소드, 벽의 중요성이 사라진 고딕 양식 때문에 벽화 대신 넓은 창문을 이용한 모자이크 양식이 생겨났다는 추론까지 전방위적인 관심을 내비친다.
1874년 클로드 모네가 아주 새로운 양식으로 '인상'이라는 일출 그림을 내놓았을 때, 그가 들려주는 파리 시민들의 반응은 현기증이 날 정도이다. "대체 이게 뭐죠?"
저자는 미술사만 다룬 게 아니다. 바흐 베토벤 쇼팽 브람스 등 음악 분야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이론가의 냉랭한 문체가 아니라, 음악의 세계에 빠져들고 싶다면 돈을 아껴 음반을 하나씩 수집하라고 일러주는 이웃집 아저씨 같은 풋풋한 덕담이다. 책은 분명히 60여 년 전 새로운 예술사의 비전을 제시한 가치 있는 고전이다.
헨드릭 반 룬 지음ㆍ이덕렬 옮김
김관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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