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개월만 빨랐어도.. 50년을 한결같이 형님 이름만 부르시던 어머니는 이제는 형님을 알아보실 수 없을 것 같습니다."31일 김민하(金玟河ㆍ67)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위원장은 둘째 형님 성하(成河ㆍ74)씨가 제3차 이산가족방문단 북측 후보자 200명에 포함됐다는 소식을 듣고, 반년 전 쓰러져 위독한 100세 노모 박명란(朴命蘭)씨 생각에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10남매 중 성하씨 등 3남매는 북으로, 또 두 형제는 일본으로 뿔뿔이 흩어진 김씨 가족은 그의 말대로 일제와 분단이 가져온 "민족 비극의 상징"이었다.
김씨가 1950년 고려대 경상학부 3학년이던 형 성하씨가 전쟁발발과 함께 서울 성북동 자취집에서 자취를 감춘후 소식을 처음 접한 것은 61년 '황태성 사건'때.
북의 밀명을 받고 우리 정부와 통일방안을 협의하기 위해 왔다는 황씨를 돕다 3년간 옥고를 치룬 김씨는 당시 중앙정보부에 수사요원으로부터 성하씨가 북의 대학교수로 있다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그 뿐이었다.
92년부터 5년간 중앙대 총장을 지내고, 한국대학교육협의 회장과 한국교총 회장을 역임한 김씨 마저도 북에 계신 형님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살아야 하는 세월이 계속됐다.
김씨는 지난해 민주평통 수석부위원장으로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을 수행, 평양 남북정상회담에 다녀오면서도 "공(公)보다 사(私)를 앞세울 수 없다"는 생각에 형에 대해 함구했다.
"그때 평양에서 수소문만 했어도 쓰러지시기 전에 형님 소식을 전해드릴 수 있었을 텐데.." 김씨는 "형님이 꼭 상봉대상자로 선정돼 평생을 눈물로 보내신 어머니와 재회할 수만 있다면 더이상 바랄 것이 없다"고 말했다.
안준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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