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레의 전 군부독재자 아우구스토 피노체트를 법정에 세우려는 후안 구스만 연방 치안판사의 결연한 의지가 조금씩 결실을 맺고 있다.구스만 판사는 29일 납치와 고문, 살인 등 혐의로 피노체트 종신 상원의원을 기소한 뒤 가택연금 조치했다. 고령(85세)과 치매, 심장질환 등 건강상 이유를 내세우며 재판을 모면해 보려던 피노체트도 이번 만큼은 빠져 나가기 어렵게 됐다.
대법원이 요구한 형사소송 요건을 구스만 판사가 완벽하게 충족시킨 데다 국민여론도 재판 진행 쪽으로 점점 기울고 있기 때문이다.
구스만 판사와 피노체트의 대결은 피노체트가 지난해 3월 스페인의 발타사르 가르손 판사 등의 공격을 물리치고 영국에서 칠레로 귀환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군부 등 피노체트 지지세력의 압력에 밀린 의회가 피노체트에게 이전보다 강력한 면책특권을 부여하자 그는 1,000여페이지가 넘는 피노체트 관련 서류를 법원에 제출, 면책특권 박탈을 요구했다.
이와 함께 자신이 맡고 있는 200여건의 피노체트 인권유린 관련 소송 가운데 우선적으로 '죽음의 특공대'라는 집단 학살사건으로 피노체트를 기소했다.
구스만 판사는 피노체트가 쿠데타를 일으킨 직후인 1973년 특수부대원들을 동원, 수감 중이던 정치범 75명을 총살한 이 사건을 밝혀내기 위해 전국의 강제수용소들을 탐문 조사, 집단 매장지 등 물증을 확보했다. 결국 칠레 대법원은 지난해 8월 피노체트에 대한 면책특권을 박탈한다고 판결, 단죄할 길을 열어주었다.
그러나 노회한 피노체트는 다시 구스만 판사를 좌절에 빠뜨렸다. 피노체트는 구스만 판사가 건강검진 항목을 임의로 변경했다며 검진에 응하지 않는가 하면, 심장이상 등을 이유로 재판 출석을 거부했다. 여기에다 칠레 대법원은 지난해 12월 구스만 판사가 피노체트를 기소하자 피의자 신문 등 절차상 하자가 있다며 기각했다.
그는 다시 법원이 정한 시한인 지난 15일까지 피노체트에 대한 정밀 검진을 마쳤고, 4차례나 연기된 끝에 23일 피노체트 자택에서 직접 신문절차를 밟았다. 구스만 판사가 다녀간 후 당황한 피노체트가 갑자기 뇌졸중 증세를 보여 군병원에 옮겨졌으나 이틀 만에 퇴원, 기소를 앞둔 '긴급 입원 사태'도 해프닝으로 끝났다.
그러나 칠레의 '깨끗한 손'이라는 별명을 얻은 구스만 판사의 과거청산 노력은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피노체트가 '기억이 안 난다'거나 '모르쇠 작전'으로 버틸 경우 기소 과정 만큼이나 지리한 법정공방전이 펼쳐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동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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