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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세이 유라시아 천년] (17)몽골제국의 출현과 해상교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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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세이 유라시아 천년] (17)몽골제국의 출현과 해상교통

입력
2001.01.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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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역사상 최대의 영역을 자랑했던 몽골제국의 출현으로 유라시아대륙은 하나의 교역권망 속에 들어가게 됐다.두 대륙을 연결하는 육로나 해로가 이 때 뚫린 것은 아니지만, 두 세계의 거리는 크게 단축됐고 왕래자도 크게 늘어났다.

몽골제국의 역사는 1260년을 경계로 양분된다. 무적의 기마병을 통해 동쪽 한반도에서 서쪽 도나우강 하구, 동지중해 연안에 이르기까지 그 영역을 넓혔던 시기를 전기로 본다면, 제위계승전쟁의 결과 제5대 몽골 대칸으로 등장한 쿠빌라이(世祖ㆍ1260~94)와 그 이후의 시기는 새로운 시대였다.

쿠빌라이는 점차 독립영역화 경향을 보이던 서방의 3대 지역을 묶어 세계연방을 구축해야할 필요를 느꼈다. 그는 경제와 유통을 장악함으로써 그의 명령에 일률적으로 움직이지 않는 몽골제국 전체를 연결하려 했다.

즉, 1260년을 기점으로 유라시아세계는 군사적 확장시대로부터 다극화되었지만 안정화를 이룩한 몽골제국을 축으로 서서히 경제중시의 시대로 들어서게 된 것이다.

몽골지배의 근간의 하나인 역참제, 즉 잠치(站赤)는 당초 군사ㆍ정치목적만의 특급 역전(驛傳)이었지만 중국 내지와 유라시아 전역의 육상 수상 해상에 이르는 각종 편의를 제공하여 이제는 없어서는 안될 경제ㆍ유통수단이 되어 있었다.

게다가 그것은 초광역으로 네트워크화 해있었다. 이 길을 통해 마르코 폴로가 중국을 찾았다. 쿠빌라이는 역참제를 중심으로 하는 육로만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쿠빌라이가 남송을 그 영역에 넣고 중국의 주인이 된 것은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첫째 남중국, 즉 강남이 기존에 갖고 있던 거대한 유산의 획득이다.

야콥 단코나가 방문했던 13세기 중국의 무역도시 '짜이툰'(刺桐ㆍ泉州인 듯)은 불빛이 꺼지지 않는 '빛의 도시'였고, 마르코 폴로가 쿠빌라이칸의 신하로 활약하면서 방문한 후 '하늘의 도시 킨사이(行在)'라 불렀던 항저우(杭州)는 당시 인구 100만 명이 사는 꿈같이 화려한 도시였다.

당시 10만의 베네치아, 25만의 파리 인구에 비해 강남의 번영은 그 인구수만큼이나 차이가 컸다. 이런 경제력에다 상당한 전력의 해상함대, 그에 수반한 나침반, 조선술, 항해술에 관한 지식 정보 모두가 바로 남송의 유산이었다.

이런 재산들은 대개 당대(唐代)에 이미 성취되었거나 그 단초가 열렸던 것들이다.

당대로부터 이런 재산들을 물려받았으면서도 수동적이고 민간의존적인 남송 정부는 정부 스스로 솔선해서 해단을 조직하거나 스스로 교역으로 나가지는 않았다.

둘째, 남송을 수중에 넣고 나니 습윤 아시아의 열대해가 시야에 들어왔다. 능동적이고, 정부주도적이고 해양지향적 경제관을 가진 쿠빌라이에게는 당연한 것이었다.

몽골제국이라는 하나의 큰 순환체계로서 연결시키기 위해서는 유라시아를 꿰뚫는 해상교통상의 거점과 진로확보가 선결과제였기 때문이다.

이 지역에 대한 군사적 행진은 크게 성공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해상로는 확보되었다. 동쪽 첸저우(泉州) 광저우(廣州)를 떠난 경덕진(景德鎭)의 도자기가 동남아시아의 팔렘방 브루나이, 인도남단의 여러 항구를 거쳐 서쪽 페르시아만에 임한 호르무즈에 도착한다.

그리고 북쪽의 흑해연안의 수다크, 지중해의 베네치아 제노아 등 항구도시로 다시 운반되었다. 마르코 폴로가 돌아간 길도 바로 이 항로였다.

쿠빌라이의 구상은 몽골이 가진 초원의 군사력에다 유라시아 최대의 '중화경제력'을 합체시키고 종래 몽골과 공생관계에 있었던 무슬림 상업권을 전면적으로 활용하는 경제지배라는 신 방식이었다.

쿠빌라이는 이 과정에서 의외의 걸물을 얻게 되었다. 바로 아랍계 내지 이란계라 여겨지는 포수경(蒲壽庚)이란 자로, 그는 남송정부로부터 제거시박(制擧市舶)으로 임명되어 천주를 거점으로 무려 30년간 무역과 선박관리 부분을 장악해 왔던 해양상업의 전문가였다. 포수경이 그의 능력을 알아주는 쿠빌라이에게 헌신한 것은 당연했다.

포수경이 근무했던 시박사(市舶司)도 당 현종(玄宗) 때 만들어진 것이고, 당말 '황소(黃巢)의 난' 당시(879) 광저우에서 학살된 이방인이 12만이었던 사실은 당시 남중국이 이미 유라시아 해상로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몽골경제의 주된 담당자였던 이란계의 무슬림과 위구르 상인그룹도 당대 내륙통상에서 활약한 소그드 상인의 전통과 혈맥을 계승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동료조합'의 의미인 오르톡(Ortoqㆍ斡脫)이라는 기업조직을 형성하고 있었다. 쿠빌라이는 이 무리의 사업집단을 국가경영에 끌어들였다.

이들 무리가 가진 정치 문화 정보의 능력과 연줄이 유라시아 넓은 지역에서 유효하게 발휘되었다.

쿠빌라이의 경제시스템에서 보이는 특징은, 중앙재정은 농업생산물로부터 세수에 거의 기대지 않고 전매와 통상의 상업이윤으로 세입의 8~9할을 거두었다는 점이다. 중상주의적 재정운영이라 할 수 있다. 당시 최대수입원은 전매품이 된 소금의 교환권인 염인(鹽引)의 판매대금이었다. 염인은 은화를 보조하는 화폐가 되었다.

수도 대도(大都ㆍ지금의 베이징)는 바다와 육지를 연결하는 터미널이었다. 대도는 현재의 베이징(北京)과 달리 도시 안에 항구를 안고 있었다.

지금은 북경시민의 낚시터로 변한 지쉐이단(積水潭)이 그것이다. 지쉐이단에서 운하를 통해 통저우(通州)로 다시 해항(海港) 직고(直沽ㆍ지금의 톈진)로 연결됐다.

남송의 수도 항저우를 비롯하여 닝보(寧波) 푸저우(福州) 첸저우 광저우 등의 항만도시로부터 동남아시아 인도양에까지 무역선이 항해했다. 중국의 남북이 해로를 통해 연결되었던 것은 몽골시대부터이다.

이런 남북항로의 개설 때문에 상하이(上海)가 비로소 역사상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내가 방문할 때마다 달라지는 스카이라인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던, 아니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이 '천지개벽'이라 놀라워했던 상하이도 몽골제국이 아니었다면 아예 탄생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통상입국'의 자세를 띤 몽골의 해양진출이 중국에 남긴 영향은 기간은 짧았지만 그 정도는 심각했다.

명의 성조(成祖) 영락제(永樂帝)는 아버지가 정한 난징(南京)에서 베이징으로 수도를 바꾼 것이 상징하듯이 태조 주원장의 충실한 후계자가 아니라 원 세조 쿠빌라이의 재현이었다.

그는 수 차례 스스로 몽고사막을 넘어 북방민족과 싸운 유일의 한족출신 중국 천자였다. 남방으로 월남을 정복했고, 남아시아의 여러 나라를 빼앗기 위해 정화(鄭和)를 지휘관으로 하는 대함대를 파견하여 아프리카 동쪽 해안까지 진출했다. 그는 몽골 대제국의 재건을 꿈꿨기 때문이다.

박한제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후원 삼성전자

■베이징 지쉐이탄

그 옛날 베이징(北京)을 바다와 이어주는 운하의 중심지였다는 지쉐이단(積水潭)은 지금 옛 자취를 상상하기 힘들다.

베이징 중심부인 시청취(西城區) 지역에 있는 지쉐이단은 커다란 축구장 정도 넓이의 연못이다. 요즘처럼 추운 날씨 때문에 물이 꽁꽁 얼면 동네 꼬마들이 어김없이 몰려와 썰매를 타거나 얼음 위를 뛰어다니면서 논다.

여름철에는 인근 주민들이 더 많이 몰려든다. 역사에세이팀이 이곳을 찾았을 때도 더위가 기승을 부려서인지 주민들이 삼삼오오 모여 버드나무 그늘 아래서 시원한 바람을 맞고 있었다.

중년의 남자들은 러닝셔츠만 입거나 아예 웃통을 벗어제친 채 낚싯대를 던지고 있었다. 직접 지쉐이단 안으로 들어가 투망질을 하는 이도 적지 않았다.

오랜 세월 퇴적물이 쌓였기 때문에 깊이라야 무릎이 빠질 정도. 하지만 그물을 던질 때마다 팔뚝만한 잉어가 가득 잡혀 사람들은 환호성을 올린다.

쿠빌라이는 큰 고생을 해가며 서북쪽 창핑(昌平)현의 물을 끌어와 지쉐이단을 건설했다.

또 지쉐이단을 통해 각종 물산이 몰려왔다. 그 물산을 판매하는 큰 시장이 지쉐이단 부근에 형성되기도 했다. 지금은 시장도, 운하로 이어지는 물길도 흔적을 찾을 길 없다.

그저 인근 주민들이 시간을 보내는, 동네 연못이자 놀이터일 뿐이다. 베이징 시내의 다른 호수들처럼 공원으로 이용되는 것도 아니어서 가까운 곳에 사는 주민들이나 찾는다. 놀러나온 시민을 잡고 지쉐이단의 역사를 아느냐고 물었지만 고개만 저을 뿐이었다.

박광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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