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개벽이 유행어가 됐다. 김정일(金正日) 북한 국방위원장이 중국방문중 상하이(上海)를 둘러보면서 받은 충격을 표현한 말이다. 십 수년 전 방문 때와 너무 달라진 모습에 그렇게 놀라기도 했을 것이다.북한이 요 몇 달 사이 그런 모습으로 변하고 있다면 믿을 사람이 있을까. 더구나 '먹고 사는 문제'에 천지개벽이 일어나고 있다면 더욱 이해하기 어렵다 할 것이다.
그러나 기근 문제가 풀려가고, 따라서 사회 분위기가 좋아지고 있는 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
한 시사 월간지 신년호에 실린 중국동포의 친척 방문기에 최근의 북한 실상이 잘 그려져 있다. 필자 정동구씨는 13쪽 분량의 방북기 말미에서 먹을 것이 조금 풀리니 청진역 일대를 떠돌던 수백명의 꽃제비들이 50여명으로 줄었더라면서, 정말 천지개벽이라고 썼다.
북-중 국경지대에서 날아오는 뉴스에도 탈북자 감소와 제재 완화, 국경무역 급증 같은 낭보가 많다.
중국 옌볜에 사는 정씨는 지난 10년간 해마다 곡식 수레를 끌고 함경북도 회령에 있는 삼촌과 고모 집을 방문했는데, 지난 11월에 갔을 때는 첫인상부터 활기찬 분위기가 전년과 너무 달라 마음이 놓였다고 했다.
중국 사는 조카가 왔다는 소문에 몰려든 일가와 이웃 사람들을 위해 큰 가마솥에 두 번이나 밥을 해내고, 두부 배추국에 중국 술을 곁들여 동네잔치가 되었다. 전 같으면 이런 먹자판을 상상이나 하겠는가.
99년11월 일본의 시사 월간지에 실린 조선족 방북기에는 중국친척에게서 식량원조를 받는 사람들이 그 사실을 숨기기에 전전긍긍하는 모습이 잘 그려져 있다.
사실이 알려지면 식량을 나눠달라는 일가들의 부탁에 시달려야 하고, 절도나 강도 피해까지 걱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식량을 꽁꽁 숨겨두었다가 조금씩 옥수수로 바꿔 죽을 쑤어 하루 두 끼를 때워야 했다.
그런데 이제는 끊겼던 배급이 다시 나오기 시작해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9월까지는 한 달에 10일분이 지급되다가 11월부터는 20일 분으로 늘어 조금 여유가 생겼다.
30일분을 받을 때도 모자란다 했는데, 20일분으로 도 부자살림 하게 됐다고 좋아하고 있다. 옥수수 야채밥이지만 희멀건 풀대죽 신세를 면하게 된 것이다.
다음날 아침 친척들은 모두 출근을 했다. 오랫동안 닫혔던 담배공장과 농기계수리공장이 다시 돌고, 끊겼던 월급도 나오기 시작했다.
청진조선소와 성진제강소 같은 기간산업체 굴뚝에서도 연기가 솟고 있었다. 중국과의 통상문호가 개방돼 그 쪽에서 원자재가 들어오고, 제품이 나가고 하기 때문이다.
무료함을 달래려고 시장에 나가보니 점포마다 온통 중국제품으로 넘쳐 났다. 값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비쌌지만, 자본주의 사회의 상징인 시장이 생긴 사실이 북한의 변화를 말해주지 않는가.
상하이의 천지개벽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김정일은 신의주에서 2박3일간 공업단지를 둘러보면서 '현지지도'를 했다.
장쩌민(江澤民) 주석과의 정상회담 때 단둥(丹東)과 신의주를 묶어 경제특구를 만들기로 했다는 소식과 무관하지 않은 행보다.
북한 TV방송이 28일 김정일의 중국 방문 기록영화를방영한 것도 중국식 개혁 개방에 대한 그의 집착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북한의 진정한 개방의지에 관한 논란이 정리되지 않았지만, 10년 가까운 식량난 끝에 문제가 풀려가는 것도 부분적인 개방정책의 산물이 아닐까.
북한의 진정한 천지개벽을 위해 체제 유지를 전제로 개방과 개혁에 도움이 되는 일들을 찾아내고, 여건을 조성하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라 생각된다.
(문창재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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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아리」는 다음주부터 이종구 이상호 송태권 논설위원이 돌아가면서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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