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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완상 교육부총리 / 햇볕론 씨앗 뿌린 저항지식인 대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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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완상 교육부총리 / 햇볕론 씨앗 뿌린 저항지식인 대명사

입력
2001.01.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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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완상(韓完相) 교육부총리는 1980년대 초까지 저항적 지식인의 대표인사였다. 유신시절 그가 쓴 '민중과 지식인'은 운동권은 물론 대학생들이 숨 죽여 읽은 필독서였지만 5공이 끝나도록 정부의 검열대장에는 엄연한 금서였다.미국 유학 및 교수생활을 통해 반전운동 등 진보적 사회운동을 체험하고 70년 귀국,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로 임용됐으나 유신반대 등으로 10차례 가까운 연행, 감금, 해직을 반복하는 고통을 겪었다. 특히 80년에는 '김대중씨 내란음모사건'으로 투옥까지 됐다.

정치적으로는 김대중 대통령 진영과 김영삼 전 대통령 진영을 오고 간 드문 경력도 지녔다. 반 독재투쟁 때는 김대중 진영의 핵심인사였고 두 김씨가 분열하자 김영삼 캠프에 합류했다.

그러나 거친 이력과 달리 실제는 매우 온화하고 자상한 성격이다. 순탄치 않았던 교수생활이었음에도 "양심에 따르는 것은 인간적 삶을 위한 최소한의 행동"이라고 단언할 만큼 소신이 뚜렷하다.

교육부총리에 기용된 뒤 첫 다짐이 "출세지향적 인간이 아니라 공익적 인간을 키워보겠다"일 만큼 사회적 정의에 대한 신념도 투철하다. 전교조의 이례적인 환영성명도 그의 삶과 소신에 대한 깊은 믿음과 기대에서다.

독실한 크리스천으로 84년 복직한 뒤에는 급진적 사회운동과는 거리를 두었지만 기독교민주화운동, 경실련 등 시민운동에는 꾸준히 참여, 자신의 목소리를 잃지 않았다.

개혁적 이미지에 힘입어 문민정부 때는 첫 통일부총리에 발탁됐다. 보수파의 반발에 밀려 10개월 만에 중도하차했지만 장기수 이인모씨를 북한에 보내는 등 '햇볕론'을 앞서 실천했다.

당시 그가 "햇볕론은 북한은 물론 우리의 경직된 냉전적 사고와 제도까지 바꿔 모두가 발전하는 계기를 마련하는 것"이라며 내건 '공변공영(共變共榮)'론은 현 정부의 대북정책과 일맥상통한다.

상지대 총장을 맡아 고질인 학내분규를 수습한 경영능력도 생애 두번째 부총리가 되는 행운에 가점이 됐다. 부인 김 형(金 馨ㆍ57)씨와 3녀 ▦경북 김천ㆍ65세 ▦경북고ㆍ서울대 사회학과 ▦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부총리 겸 통일원장관 ▦한국사회문화연구원 회장 ▦ 경실련 고문 ▦ 한국방송통신대ㆍ상지대 총장

이동국기자

east@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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