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가는 시민을 아무나 붙들고 우리나라 시민운동사에서 최대 쾌거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지난 총선 때의 낙선운동이라고 대답하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낙선운동이 위헌이라는 판결을 받고, 벌금형까지 받았다.법학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으로서 그 판결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할 생각은 없다. 법의 해석에는 분명 여론이나 국민정서에 대한 배려보다는 법률적인 정확성이 더 존중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래야 법치가 확립될 수 있고 여론의 압력에 의한, 또는 법관의 자의적인 법조문해석으로 인한 판결의 피해자가 나오지 않게 된다.
그래도, 시민연대의 낙선운동이 위헌판결을 받았다니까 마음이 어두워진다. 물론 이 판결로 해서 시민운동이 서리를 맞고 위축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부패정치인을 낙선시키려는 운동을 위헌으로 만든 헌법이나 선거법의 조항들에 대한 국민적 토론이 활발히 이루어져 부패정치를 추방하려는 시민운동이 합법적이 되도록 법률도 수정되고 시민운동은 더 큰 성원과 지지를 받을 것이라고 믿는다.
시민운동은 언론에 못지않게 중요한 민주주의와 인권의 파수꾼이다. 시민운동의 역사가 깊은 나라는 독재로 퇴행할 우려가 전혀 없는 나라다.
현대에 와서 시민운동은 정부의 공권력 남용과 인권침해에 맞서 투쟁할 뿐 아니라 국제적인 사안에서도 그 나라 국민의 정서와 입장을 대변해 외교협상에 힘을 실어 준다.
또한 당장 먹고 사는 문제를 넘어 정의와 평등사회의 원칙이 유지되도록 하고, 오늘의 번영을 넘어 다음 세대를 위한 생존조건의 확보를 위해 힘쓴다.
그러니까 시민운동은 민주주의의 보루일 뿐 아니라 생계에 매달려야 하는 보통 시민들이 내다 볼 정신적 여유가 없고 힘써 볼 여력이 없는 정도(正道)의 삶, 공동체의 삶, 자손만대를 위한 삶을 준비하는 운동이다.
북한에 시민운동이 있다면, 북한 동포들이 대규모 숙청을 당하고 의문의 실종이 되고, 지옥의 탄광이나 사상범 감옥에서 끔찍한 고통을 당하다가 죽어가겠는가.
북한에 시민운동이 있다면 실패가 불보듯 뻔한 대규모 국책사업들이 그대로 시행되어 국민이 도탄이 빠지게 되었겠는가.
그리고 국민은 기아에 허덕이는데 고위층은 기쁨조들과 흥청거리느라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이웃나라에 천지개벽이 일어나는 것도 모르는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우리는 시민운동을 후원하는 것이 우리의 민주주의와 인권, 그리고 지구의 피폐, 자원의 고갈을 방지하는 최선의 투자라는 것을 깊이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까지 시민운동의 후원에 너무 인색했다. 시민들의 후원금으로 시민운동단체가 운영이 안되어서 시민운동의 감시대상이 되어야 할 기관에서 후원금을 받아 운영할 수밖에 없는 것은 시민의 수치이다.
시민운동이 없었으면 아직도 우리는 정부에 자칫 밉게 보였다가는 남산에 끌려가는 악몽을 꾸며 살고 있을지 모르고, 우리의 산천은 지금보다 훨씬 심하게 국토개발이라는 명목으로, 또 탐욕스러운 기업에 의해 파괴되고 전국이 위락시설로 뒤덮였을 것이고, 우리 자녀들은 오염과 공해물질 때문에 부지기수로 병자나 장애인이 될 지도 모른다.
우리는 시민운동에 후원은 하지 않으면서 시민운동가들에게 우리보다 훨씬 높은 수준의 도덕을 요구한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일부 시민운동가들이 '의식이 부족한' 시민들에 대해 갖는 도덕적 우월감에 대해서는 고깝게 생각한다.
그래서 시민운동가가 어떤 도덕적 잘못을 저질렀을 때 소리높여 비난하고 엄격한 처벌을 요구한다. 물론 시민운동가들도 진정으로 시민을 대변하는 운동이 되기 위해 심리적 장벽을 허물고 시민과 늘 만나며 대화할 필요가 있지만, 시민들은 자신과 후손과 나라를 위해 시민운동을 지지하고 후원해야 한다.
서지문 고려대 영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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