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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생각] 新가정·舊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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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생각] 新가정·舊가정

입력
2001.01.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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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어떻게 쇠셨습니까? 오랜만에 부모님 뵙고 또 형제 자매들 만나시고 얼마나 즐거우셨습니까? 아니, 다음과 같이 여쭈어보는 것이 더 현실적일지도 모르겠습니다.친정 부모님 그리움에 가슴이 아프고, 그 곳 남매들 생각에 마음이 저린데, 할 일은 태산 같아 몸조차 견디기 힘든 몇 날을 정말이지 어떻게 견디셨습니까?

불쑥 말을 꺼낸 것이 그만 여성의 시각만을 드러낸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만 그래도 올해는 이렇게 운을 떼도 괜찮을 듯 싶습니다.

여론들을 통해 '전통'도 '현실'도 제법 너그러워졌기 때문입니다. 명절이면 견뎌야 하는 주부들의 '고달픔'을 이야기하는 글이나 말이 전보다 꽤 풍성해졌습니다.

남자들도 명절 가사노동을 분담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주장이 일고 있고, 해를 걸러 친가와 처가, 시댁과 친정을 오가는 명절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조차 상당한 설득력을 가지고 일고 있습니다.

이제는 명절 때문에 '누리는 무리와 짓밟히는 무리'가 분화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들이 익어가는 듯 합니다. 참 다행한 일입니다.

이전의 전통이 그릇된 것만은 아닙니다. 딸이 시집을 가면 '출가외인'으로 여겨 친정과 사실상 단절되던 '질서'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시댁에서 차지하는 새로운 자기 정체성이 시집간 사람들에게 생겼습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자리에서는 지금 일컫는 투로 '여성들이 겪는 명절의 고달픔'을 논의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세월은 그 질서를 더 이상 '적합한 것'이 아니게 하고 있습니다. '가정'이나 '가족'의 개념, 결혼의 의미와 시댁이나 친정의 개념, 부부라는 것, 부모와 자식이라는 것에 대한 이해 등이 모두 달라졌습니다.

'대를 이어야 한다'는 전통적인 절대의식이 지금 여기에서 얼마나 현실 적합성을 가지고 있는지 유념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가정, 새로운 가족 질서를 마련하는 일은 불가피할 뿐만 아니라 진지하게 고뇌해야할 당면 과제입니다.

이러한 변화가 '가족의 해체'가 아니라 '새로운 가정의 출현'을 기하는 계기이도록 하는 현실적인 노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새로움의 추구 과정에서 반드시 유념해야 할 것이 다만 전통적인 것이라는 이유로 실종되는 듯 해서 불안합니다.

공동체 구성원들의 책임주체로서의 자의식이라든지, 전체의 '복지'를 고려하는 자기 희생정신이라든지 하는 것들이 '새로운 적합한 가족의 문화'를 빚는 일에서 간과되거나 배제되고, 다만 '편의'만이 새로운 가정논의의 준거가 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가 그것입니다.

물론 이제까지 그러한 책임의식이라든지 희생의 덕목이 가족 내의 여성에게만 거의 일방적으로 '강요'된 것은 사실입니다.

따라서 새삼 여성들이 그런 것으로부터 우선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실제로 그것은 책임주체의 자의식도 아니고 덕목도 아닌 다만 '굴레'이기만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버려야 할 것'은 아닙니다. 이제는 그러한 의식이나 덕목이 새롭게 해석되면서 가족 구성원 모두가 스스로 지니고 실천해야 하는 삶의 기본적인 태도가 되어야 합니다.

아무리 세상이 바뀌어도 책임주체로서의 자의식이나 희생이라는 덕목은 공동체 구성을 위한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것들을 배제하는 '새로운 가정의 구축'이란 실은 위장된 동물적 이기심을 실현하는 것 이상의 어떤 것도 아닙니다.

설 잘 쇠시고 오셨는데 공연한 말씀을 드려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 때가 아니면 언제 또 이러한 일, 곧 가족, 가족의 삶, 그것이 요청하는 기능과 덕목 등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해보겠습니까?

아무쪼록 이번 설 경험들이 잘 다듬어지면서 내년에는 더 행복한 설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정진홍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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