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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취재 / 국가 史草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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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취재 / 국가 史草가 없다

입력
2001.01.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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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주요 회의의 내용을 후세에 남기기 위해 마련된 공공기록물관리법이 시행 1년만에 휴지조각으로 전락할 위기에 빠졌다. 법령 자체가 강제력이 없어 솜방망이나 다름없는데다 정부가 회의의 전체 내용을 기록하는 것에서 요지만 남기는 것으로 세부조항을 완화하는 등 입법취지까지 크게 훼손했기 때문이다.시민단체와 전문가들은 "주요 정책의 결정과정과 잘못된 정책에 대한 책임소재를 따질 수 없게 하려는 발상"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최근 구조조정의 후퇴와 현대계열사 특혜 논란을 빚고 있는 산업은행의 부실 회사채 인수방침은 지난 해 12월26일 열린 경제장관간담회에서 결정됐다. 최대 10조원가량의 부실 회사채를 산업은행이 떠안게 돼 산은의 부실 회사채 인수는 사실상 국민이 부담해야 할 공적자금이다.

그런데 이 간담회의 회의록은 아예 없다. 주무부서인 재정경제부는 "비정기적이고 비공식적인 간담회 성격이어서 회의록을 만들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지난 해 1월부터 시행된 공공기록물관리법에는 '공식ㆍ비공식 여부와 상관없이 차관급 이상이 참가해 정책을 심의ㆍ조정하는 회의는 회의록을 작성해야 한다'고 규정돼 있다. 따라서 이날 간담회는 실정법을 위반한 것이다.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들은 이와 관련, "퇴출해야 할 부실기업을 살려주느라 국민 부담을 가중시킨 꼴"이라며 "이에 대한 책임추궁을 걱정한 관료들이 회의 내용을 은폐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현행법에 따르면 회의록을 작성하지 않은 관료들을 징계할 수 없다.

법률에 회의록 작성은 의무화해 있지만 위반한 경우에 대한 벌칙조항이 없기 때문이다. 회의록 작성에 대한 통일된 지침과 체계도 없어 기록물 관리를 맡고 있는 정부기록보존소조차 회의록 작성 여부를 알지 못하는 형편이다.

이 같은 기록불감증은 정부기록물의 보존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수치상으로는 90년대 후반부터 정부기록물의 기록보존소 이관이 급증, 99년의 경우 14만6,186건을 기록했지만 아직 해당부처의 서류함에 방치된 기록물에 비하면 여전히 미미한 수준이라는 게 관계자의 분석이다.

행정자치부는 최근 입법예고도 없이 공공기록물관리법 시행령 가운데 회의록을 작성할 때 '발언 내용' 전체를 기록해야 하는 조항을 '요지'만 기록해도 되는 것으로 개정했다.

발언요지만 기록할 경우 참석자들의 자의적 판단에 따라 정책결정 과정이 왜곡될 가능성이 크다며 관련 교수 200여명이 '개악 불가'를 외쳤지만 소용없었다.

명지대 기록관리학과 김익한(金翼漢) 교수는 "환란(換亂)과 공적자금의 부실운영에 대한 책임소재를 밝힐 수 없는 절대적 이유가 바로 공공기록이 없기 때문"이라며 "법률 재정비와 강력한 실천의지가 없다면 제대로 된 역사적 기록조차 남기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최성욱기자

feelchoi@hk.co.kr

이상연기자

kubrick@hk.co.kr

■"우리나라의 기록 부실 실태는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우리 사회의 '기록불감증'은 고위 공직자와 공공기관, 일반기업에 이르기까지 심각하게 퍼져 있다. 지난해 1월 건국 이후 최초로 공공기록물관리법을 제정, 기록 작성의 모범을 보이겠다고 다짐했던 정부는 시행 1년도 지나지 않아 기록부실 사태를 자초했다.

정책결정 과정을 투명하게 밝힐 수 있는 혁신적인 법률을 제정해놓고도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토양 마련에 소홀했다.

우선 솔선수범해야 할 고위 공직자들이 법률에 명시된 기록물 작성의무를 무시하는데도 아무런 제재조항이 없다. 참여연대가 지난 해 10월27일 열린 '기업지배구조개선 방안 관련 경제장관간담회 및 당정협의회' 자료공개를 요청하자 재정경제부는 "회의록을 작성하지 않아 이미 발표된 보도자료 외에는 공개할 수 없다"고 답변했다.

'차관급 이상의 주요 직위자가 참석하는 정당과의 업무협의를 위한 회의'의 회의록 작성을 의무화한 공공기록물관리법 시행령 8조를 어긴 것이다.

참여연대 관계자는 "지난 해 열렸던 경제장관회의와 당정협의회 가운데 중요 정책을 결정했던 회의 기록 10여건의 공개를 요청했지만 단 한 건도 답변을 듣지 못했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고위 관료들이 책임회피를 위해 법률을 정면으로 위반하고 있지만 처벌이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현행 법률로는 기록의 무단파기 및 국외유출 정도만 처벌이 가능하다.

법률시행 후에도 낙후성을 면치 못하는 기록보존체계는 정부의 의지 부족을 엿보게 한다.

정부기록물 가운데 20년 이상 보존되는 문서는 전체의 4% 수준. 그나마 정부 공식문서를 보존하는 행정자치부 산하 정부기록보존소에 이관되지 않고 해당기관의 서류함에 방치되는 것이 부지기수다. 보존소는 "행정기관이 보존소에 넘기지 않고 자체 보유중인 주요 기록물이 96년 현재 480만건"이라며 "그 이후 약 20만건을 더 수집했지만 기관별 보유 현황은 아직 파악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전산시스템 설치가 당초보다 3년 미뤄지는 등 과학적 관리의지가 없는데다 소장이 국장급으로 위상이 낮아 다른 부처들이 보존소 지침을 따르지 않는 것이 큰 원인이다.

기업 등 민간부문의 기록부실도 공공기록 못지 않다. 공적자금 투입은행에 부실원인을 제공한 기업체 임원의 책임여부를 조사중인 예금보험공사 관계자는 "개인별 책임 추적의 기본자료인 이사회 회의록 자체가 조작되거나 부실하게 기재된 경우가 많아 어려움이 크다"고 털어놓았다.

재경부가 지난 해 1월 상장기업에 대해 이사회 회의록을 작성, 공시하지 않을 경우 최고 5억원의 과징금을 부과한다고 발표했지만 실효가 없었던 셈이다. 1989~95년 공적자금 투입당시 기업임원, 회계사, 변호사 등 2,168명에 유죄판결을 내리고 이들의 개인재산 50억 달러를 환수한 미국과는 대조적이다.

이처럼 기록 자체에 대한 인식이 낮은 상황에서 행자부가 정부 중요회의 참석자들의 발언요지만 기록해도 되는 것으로 완화하자 학계를 중심으로 반발이 거세지고 있다.

김학준(金學俊) 한국국가기록연구원장은 "정확한 기록을 남기는 것은 역사에 대한 현세대의 책임일 뿐 아니라 양심적이고 소신있는 정책결정을 유도해 국가발전에 결정적 역할을 하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최성욱기자

feelchoi@hk.co.kr

이상연기자

kubric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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