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일 권좌에서 축출된 조셉 에스트라다(63) 전 필리핀 대통령이 사임과정에서의 헌법적 결함을 근거로 대통령직 '탈환' 의지를 공언, 그에 대한 사법처리가 암초에 부닥쳤다.발단은 헌법상 매끄럽지 않은 정권인계 과정에서 비롯됐다. 에스트라다는 24일 아키리노 피멘텔 상원의장에 보낸 서한에서 "대통령의 권한을 행사할 수 없게 돼 부통령이 권한을 대행토록 한다" 고 밝혀 일시적으로 대통령직을 위임한 것일 뿐 법적으로는 여전히 대통령임을 주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대통령직 박탈을 명시한 대법원 결정에 박탈 사유가 전혀 거론되지 않은 점, 대법원의 결정을 수용하는 에스트라다의 짤막한 성명에서 '사임' 이란 표현이 사용되지 않은 점도 헌법상 진짜 대통령이 누구냐는 논란을 증폭시키는 요인이다.
필리핀 헌법에는 대통령이 사망하거나 혼수상태로 회생가능성이 없을 때, 탄핵됐을 때 등 불가피한 경우에만 부통령이 대통령 권한을 대행할 수 있도록 돼 있다.
에스트라다가 사저로 돌아온 뒤 "대통령직을 사임하지 않았으며, 글로리아 아로요는 대통령 직무대행에 불과하다" 고 언급한 것은 대통령직 복귀를 위한 포석이라는 시각이다. 또 이 문제에 대한 의회차원의 논의가 불가피하다고 보는 상ㆍ하원 의원들도 적지 않아 자칫 헌정위기로도 비화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에스트라다가 사임의 합법성을 들고 나온 것은 자신의 부패혐의에 대한 사법조사를 피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됐다는 게 대체적이다. '헌법상 대통령' 임을 주장할 경우 형사 면책특권을 내세워 검찰의 칼날을 피해갈 수 있기 때문이다.
대통령 복귀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하더라도 이를 쟁점화할 경우 정치적 타협으로 사법조사가 유야무야될 수 있다는 계산이다. 일부에서는 여론 향배에 따라 에스트라다가 5월 치러지는 상ㆍ하 양원 선거나 6년 임기의 절반을 채우지 못한 점을 들어 차기 대통령 선거에 출마, 재신임을 묻는 정치재기를 시도할 수도 있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대통령궁은 "아로요 신임 대통령이 군과 의회, 법원으로부터 지지를 받고 있기 때문에 그의 주장은 부적절한 것" 이라는 입장으나, 친(親) 에스트라다 군부의 쿠데타설이 나도는 등 정가는 어수선한 분위기다.
필리핀 상원은 탄핵검사들의 집단사표로 중단됐던 에스트라다에 대한 탄핵재판을 24일 재개한다고 밝혀 이 결과에 따라 대통령 법적 논란이 판가름날 것으로 전망된다.
황유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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