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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속으로] 피의 일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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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속으로] 피의 일요일

입력
2001.01.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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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1월22일 일요일, 러시아 페테르부르크의 겨울궁(冬宮) 광장에서 여덟 시간 노동제와 최저 임금제를 요구하며 평화적 시위를 벌이던 노동자들에게 경찰과 군대가 발포해 500여명이 죽고 수천명이 다쳤다.흔히 '피의 일요일'이라고 불리는 이 날의 사태는 차르에 대한 노동자들의 신뢰를 단번에 무너뜨리고 러시아 혁명의 불씨가 되었다.

20세기 초 러시아 사회에는 혁명적 분위기가 익어 있었다.

극심한 불황, 실업자의 증가, 임금 저하, 땅값 폭등 등으로 끓어오르던 노동자들의 반정부 운동과 자유주의자들의 입헌운동이 러일 전쟁의 패색이 짙어지면서 체제의 뚜껑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1905년 혁명 즉 러시아 제1혁명을 두고, 레닌이 그것을 낳은 부모는 차리즘과 일본이라고 한 것은 그런 맥락에서다.

'피의 일요일'사건은 제1혁명의 신호탄이었다. 사건 직후 페테르부르크의 노동자들은 총파업에 들어갔고, 그것은 이내 전국으로 파급되었다.

5월에는 각지에서 노동자와 군대 사이에 무력 충돌이 있었고, 6월 말에는 전함 포템킨 호에서 반란이 일어나 정부에 큰 충격을 주었다.

10월에 모스크바 철도 노동자들이 조직한 동맹 파업이 전국적인 총파업으로 이어지면서, 혁명의 분위기는 최고조에 달했다. 마침내 니콜라이 2세는 국민의 기본권과 시민적 자유 및 선거에 의한 의회의 창설을 약속하는 이른바 10월 선언을 발표했다.

10월 선언의 발표 이후에도 노동자와 병사들은 투쟁을 계속해 12월 하순에는 모스크바 노동자가 열흘간 무장봉기를 하는 등 혁명의 물살을 퍼뜨리려고 애썼지만, 입헌 정부를 요구해 온 중산층과 일부 혁명 세력은 이 선언에 만족했고, 이듬해 5월에 러시아 역사상 처음으로 간접선거를 통한 민선의회(두마)가 구성돼 러시아 1차 혁명은 막을 내렸다.

고종석 편집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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