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리아 아로요 필리핀 부통령이 대통령 취임 선서를 한 20일 오후 수만 명의 시위군중이 모인 마닐라 도심은 함성과 축제의 물결에 휩싸였다. 아로요 부통령은 이날 힐라리오 다비데 대법원장 앞에서 "필리핀 대통령으로서 특권과 책임을 겸허한 마음으로 받아들인다" 는 취임 연설을 했다.그는 "내가 이 자리에 선 것은 신의 부름 때문" 이라며 "국민 모두가 하나가 돼 우리 앞에 놓여 있는 많은 문제들을 해결해 나갈 수 있기를 기원한다" 며 국론단합을 촉구했다. 그는 또 "에스트라다가 사임하지 않았더라도 오늘 새 대통령에 취임할 생각이었다" 며 "모범적인 지도력으로 가난을 몰아내겠다"고 다짐했다.
에스트라다 전 대통령은 이날 오전 즉각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군중이 경찰의 저지선을 뚫고 대통령궁을 향해 시위행진을 벌이자 이날 대법원이 내린 대통령직 박탈 결정을 전격 수용했다. 에스트라다와 함께 대통령궁에 남아 있던 그의 측근들은 사임 발표 직전 대통령 궁에서 빠져나갔다.
목격자들은 이날 가두시위 중 대통령궁 주변에서 최소한 3발의 총성이 들렸다고 말했다. 이들은 "에스트라다 지지자들간에 몸싸움이 벌어진 뒤 총성이 들렸다"고 밝혔는데 언론들은 "경찰의 경고사격이 분명하다" 고 보도했다.
에스트라다는 19일 밤 즉각 사임을 요구하기 위해 대통령궁으로 찾아온 3명의 야당 밀사들에게 '술취한 상태' 에서 "납득할 수 없는 요구" 를 했다고 한 야당의원이 전했다.
에르네스토 에레라 의원은 에스트라다가 특사들에게 "당신들이 원하면 나를 쏴죽이지 그러냐" 고 말했다고 전했으며, 술 취한 것처럼 보였다고 덧붙였다. 그는 또 "에스트라다가 아무런 성과 없이 회담을 끝냈으며 (즉각 사임요구에 대해) 어이없게도 1주일의 기간을 요구했다" 고 밝혔다.
에스트라다가 19일 불출마를 전제로 5월 조기 선거안을 제시했을 때 미국은 이미 하루 전 반(反)에스트라다 시위대의 입장을 '사실상' 지지했던 것으로 20일 알려졌다.
홍콩 일간 명보(明報)는 미 국가안보회의 대변인의 18일자 성명을 인용, "미국은 현지(마닐라)의 법치 상황 및 자유 민주주의의 형세, 평화시위의 권리가 존중되는 지 등에 대해 면밀히 주시하고 있다" 고 밝히는 등 미국이 필리핀 국내 정치에 개입한 흔적이 있다고 논평했다.
신문은 미국이 1986년 페르디난도 마르코스 정권을 붕괴시킨 시민혁명 당시에도 시위대를 지지하면서 마르코스 대통령의 하야를 간접 촉구하는 등 필리핀 내정에 적극 개입했다고 밝혔다.
미 국무부 대변인은 이날 필리핀 국민들에게 "평화와 민주적 절차 및 법에 의한 통치를 존중한다" 며 "어떠한 탈법적 해결방안이나 폭력행위 등은 모두 받아들일 수 없다" 는 평화적인 사태 해결을 촉구했다.
황유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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