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의 시민혁명 성공에는 군부의 조셉 에스트라다 전 대통령에 대한 지지철회가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지난해 10월 에스트라다의 부정부패 의혹이 터져 나왔을 때 앙헬로 레예스(55ㆍ사진) 참모총장을 중심으로 한 군부는 "대통령에게 사임압력을 가할 수 없다"며 정치적 중립을 강하게 고수했다.
하지만 16일 상원이 대통령 비밀계좌 추적요청을 부결시킨 뒤 야권과 시민들의 대규모 시위로 군부에서 쿠데타설이 흘러나오는 등 국가가 위기에 처하자 레예스는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됐다.
레예스는 19일 전군에 "지휘계통을 강화하라"고 지시한 뒤 야당 진영을 찾아가 "에스트라다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부통령인 글로리아 아로요를 적극 지지한다"는 뜻을 전달했다.
그는 민주화 성지인 EDSA 교회에 모여 있던 수만 명의 시위대 앞에서 이를 전격 선언, 반(反) 에스트라다 진영으로 정국의 흐름을 몰아주었다.
레예스가 반 에스트라다 진영에 합류하자 오를란도 메르카도 국방부 장관 등 군 수뇌부와 경제 각료들의 사임발표가 줄을 이었고, 판필로 락슨 경찰청장 마저 이에 가담, 에스트라다의 권력기반이 완전 붕괴됐다.
레예스 참모총장의 이 같은 행동은 1986년 군부가 독재자 페르디난드 마르코스에 대한 충성을 철회하고 야권을 지지함으로써 시민혁명이 성공할 수 있도록 한 필리핀 군의 전통과 부합하는 것이다.
1966년 필리핀 육군사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레예스는 육군 특수부대와 정보부대를 거치면서 공산반군 및 회교 분리주의자들과의 전투를 지휘하는 등 다양한 경험을 쌓았다.
그는 1988년 미국 하버드대에서 공공행정학 석사학위를 받고, 필리핀에서 2개의 경영학 학위를 추가할 정도로 학업에 대한 남다른 열정을 보이기도 했다.
레예스는 1995년 이슬람 반군과의 협상에서 뛰어난 수완을 발휘해 능력을 인정받았고 이후 남부지역 총사령관을 거쳐 1999년 7월 참모총장에 올라 장비 현대화와 전투력 향상을 적극 추진했다. 레예스에 대한 신임이 깊었던 에스트라다는 임기가 불과 2개월 남은 그에게 정년연장을 제의하면서 마지막까지 군의 지지를 확보하려 했다.
그러나 레예스는 부정부패한 지도자의 '유혹'을 떨치고 '민의'를 따랐다.
권혁범기자
hbkwon@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