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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 한국인 이렇게 산다] (3)대박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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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 한국인 이렇게 산다] (3)대박의 꿈

입력
2001.01.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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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n't-Ask-Investment.' 지난 해 우리 증시에서 '묻지마 투자' 가 성행할 때 아시안 월스트리트 저널은 이를 그대로 직역, '대박'만 쫓으며 냄비 끓듯 하는 한국인들의 모습을 특집으로 다뤘다. 부동산, 카지노, 경마, 벤처 등 어떤 아이템이 '돈 된다'는 소문만 나면 앞뒤 재지않고 정신없이 달려드는 것을 비꼰 말이다.최근에만 해도 보물선 금광 등 확인되지 않은 노다지 발견설로 관련업체들의 주가가 천정부지로 뛰어오르다 돌연 급전직하해 막차를 탄 투자자들을 울렸다.

회사는 물론 정부까지 나서 투자자들이 폭탄돌리기식 머니게임에 현혹되지 말 것을 촉구해도 이들은 어차피 '돈놓고 돈먹기'란 심정으로 부나방처럼 덤벼든다.

폐광지역 활성화를 위해 정부가 유일하게 내국인 대상 영업을 허가한 강원 정선의 강원랜드 카지노. 지난해 10월 개장때의 우려를 비웃기라도 하듯 하루 평균 3,000명 이상이 몰려들고 하루 베팅액이 10억원을 넘는 대호황을 누리고 있다.

경기 침체에도 불구하고 지난해 과천 경마장 매출액(4조2,650억원)과 연간 총입장인원(1,155만여명)에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유전적 도박 성향?

'셋 만 모이면 고스톱을 친다'는 말처럼 유난한 한국인들의 도박 성향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상당수 학자들은 기질적 유산이라기 보다 70년대 부동산투기 붐에서 잉태한 것이라고 말한다. 부동산투기 습성이 주식시장과 경마, 벤처 투기로 이어져왔다는 것이다.

대박을 쫓는 국민성이 해악만 가져온 것은 아니다. 미래가치를 보고 뭉칫돈을 던지는 성향이 전망있는 기업에 대한 투자를 낳고, 결과적으로 기업들을 살리는 역할을 했다는 점도 부인할 수 없다.

환란 이후 대외신용도가 추락한 기업들이 자금을 조달할 수 있었던 것은 '바이코리아' 열풍 속에 폭발했던 주식시장 덕택이었다.

증권업협회의 관계자는 "국내 주식투자 인구는 현재 430만여명으로, 3가구당 1가구가 주식에 투자하는 셈"이라며 "하지만 '투기성' 행태는 시장과 개인에게 심각한 후유증만 안겨주므로 반드시 억제돼야 한다"고 말했다.

'대박'을 노리다 '쪽박'

많은 국내외 전문가들은 "어떤 아이템이든 한국인은 다른 나라 사람들에 비해 투자에 신중하지 못하다"고 공통적으로 지적한다. 강원랜드 주변에는 재산을 모두 날리고 고향으로 돌아갈 돈도 없어 노숙자로 전락한 사람들이 수십명씩 길거리를 떠돌고 있다.

정부가 '엄단'을 누누이 강조해도 인터넷의 도박사이트 고객은 폭증세를 거듭하고 있다. 각종 도박 중독증에 빠지는 환자도 급증하고 있다.

부동산투기가 잠잠해진 것 같지만 그린벨트 해제나 신도시 개발 등 호재가 발표되는 지역은 아직도 '떳다방'과 자가용 행렬이 장사진을 이룬다.

대박 선호현상에 편승해 지방자치단체들까지 복권사업에다 경마장, 경륜장, 경견장 유치경쟁을 벌이고 있다. 이 같은 경쟁을 빗대 '도박공화국' '대박공화국'이라는 비판도 나오고 있다.

절제된 도박은 투자와 재미가 될 수 있지만 한탕주의식 도박 풍조는 '망국병'이 될 수 있다. 올해는 어떤 아이템이 한국인들의 '대박 꿈'에 불을 지필까.

박정규기자

jkpark@hk.co.kr

■ 대박꿈에 젖은 전모씨

서울 강남 테헤란밸리에서 '부띠끄' 로 통하는 사설 투자자문 회사를 운영하는 전모(36)씨. 강남 '큰 손'들이 맡긴 자금을 벤처기업이나 주식, 선물, 옵션 등 돈 될 만한 곳에 투자해 불려주는 일이 본업인 전씨는 스스로를 가리켜 "한치 앞도 내다보기 힘든 한국 사회에서 단 한번의 '대박'으로 성공을 꿈꾸는 사나이"라고 부른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전씨는 안정된 생활을 꿈꾸던 평범한 샐러리맨이었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S대 상대 출신인 전씨가 군 복무(공군 장교)를 마치고 사회에 첫 발을 내디딘 때는 1995년. 전씨의 인생은 국내 최고 재벌인 S증권에 입사하면서 급변하게 된다.

객장에서 투자자들을 만나는 평범한 증권사 직원을 꿈꾸던 전씨에게 회사는 '정보 맨'의 임무를 맡겼다. 매주 화요일 여의도와 서울 명동 부근 한식점 등에서 재벌그룹 직원과 종금사, 증권사 직원 등이 만나 정치권 동향, 주식 정보 등은 물론 시시콜콜한 연예게 뒷얘기 정보까지 주고 받는 '정보 회의'에 참가하면서 전씨는 또다른 세상을 알게 됐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레 얻게 된 짜투리 정보로 주식 및 부동산 투자를 시작, 짭짤한 수익을 남기기 시작했다. 특히 수도권 신도시 개발 정보로는 4,000만원 가까운 차익을 남기기도 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97년 10월 잘못된 정보를 믿고 대학 동창들과 벌인 부동산 투자가 외환위기로 물거품이 되면서 1억원이 넘는 손해를 봤다. 주가는 폭락하고 대출금리가 연 20%를 넘어서면서 월급으로 이자 조차도 못 내는 상황까지 몰렸다.

"외국으로 도망이라도 가야겠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순간 거짓말 처럼 주가가 폭등하기 시작했다. 휴지조각이 됐던 '우리 사주'가 10배로 폭등한 1999년 겨울 전씨는 퇴사를 결심했다. 주식을 팔아 은행 빚을 갚은 전씨는 남은 돈을 털어 과거 '정보 회의' 멤버들과 테헤란밸리에 '부띠끄'를 차리게 됐다.

전씨는 "가끔 허황된 꿈을 쫓는 것이 아닌가라는 후회도 든다"면서도 "잠시나마 맛 본 대박의 꿈이 마약과도 같아 쉽게 떨쳐버리지 못한다"고 말했다. 대박 열풍에 휩싸여 안정된 삶을 포기한 전씨. 싫든 좋든 2001년을 살아가는 한국인의 또다른 자화상이다.

조철환기자

chch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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