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 잃고 외양간도 고쳤다. 수족을 자르는 고통도 이겨냈다. 그러나 아직도 갈 길이 멀다." 줄이고 자르는 구조조정으로 경제시스템, 금융시스템은 바로 세워져가고 있지만 정작 우리나라를 앞으로 10년, 20년 먹여 살릴 대표산업이 없다. 지난 3년간 산업정책이 실종되고, 때론 왜곡되면서 우리 경제의 성장엔진도 멈춰섰다.김광두(金廣斗ㆍ서강대 교수) 산업발전심의회 위원장은 "외환위기 이후 벤처 육성을 빼면 산업정책이라고 할 만한 것은 전무했다"며 "구조조정으로 국가신용도는 올라갔지만, 산업정책 실종으로 국가경쟁력은 추락했다"고 지적했다.
환란의 급한 불을 진화한 이후에도 구조조정과 산업정책이 융합되지 못하면서 구조조정은 살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 돼버렸다는 얘기다.
산업자원부는 "산업정책이 없었던 게 아니다. 구조개혁에 발맞춰 '선택과 집중' 전략에 초점을 맞췄다"고 항변한다. 대기업이 너무 비대해진 몸집을 줄이고 있을 때 벤처기업에 자원을 집중했고, 세계경제의 디지털화가 본격화한 지난해에는 IT(정보기술)산업 육성을 정책목표로 삼았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실상을 보면 정부의 말과는 거리가 멀다. 벤처기업이 1만개에 육박하며 35만개의 일자리를 창출했지만, 파이낸싱(자금조달) 자체가 창업의 목적이 되면서 자원낭비, 사회문제를 초래했다. 인터넷 이용률이 일본의 2.5배에 달하지만 부품ㆍ소재의 대일(對日) 무역적자는 연간 80억달러를 넘어섰다.
벤처 일변도, IT 일변도로 모든 자원을 집중하는 '화전민(火田民)식'정책논리가 산업경쟁력의 위기를 부채질한 셈이다. 한국개발연구원(KDI) 김주훈(金周勳) 장기비전팀장은 "정부가 전통산업과 신산업, 대기업과 벤처기업에 대한 이분법에 사로잡힌 결과 장기적 안목의 산업정책은 자취를 감췄다. 벤처정책도 코스닥정책, 실업정책적 관점이 주(主)가 되면서 산업정책적 효과가 기대에 못미쳤다"고 말했다.
산업정책 전문가들은 "지금은 '외끌이 전략'이 아니라 '퓨전(fusionㆍ융합) 전략'을 도모해야 할 때"라고 권고했다.
산업연구원 김도훈(金道勳) 산업정책실장은 "전통산업과 ITㆍBT(생명공학), 온라인(on-line)과 오프라인(off-line), 대기업의 글로벌 네트워크와 벤처기업의 독창적 아이디어가 공동전선을 구축, 퓨전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도록 산업정책의 중심을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병률기자 bryu@hk.co.kr
■손 잡아야 경제 산다
스카치테이프 제조업체이던 3M이 차세대 반도체 부품까지 생산하는 디지털업체로 변신하게 된 것은 문구용품 생산 노하우에 끊임없이 IT(정보기술)를 접목한 결과였다. 회사측은 1,300명 연구원 개개인이 사내 벤처기업으로 기능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디지털시대 산업경쟁력은 이처럼 퓨전(fusion)에서 나온다. 동ㆍ서양 음식이 한데 융합해 전혀 새로운 맛을 창조하듯 전통산업과 ITㆍBT(생명공학), 오프라인(off-line)과 온라인(on-line), 대기업의 글로벌 네트워크와 벤처기업의 독창적 아이디어, 국내기업의 노하우와 외국기업의 기술이 융합하지 않고서는 우리 산업은 수출 무대에서 2류가 될 수밖에 없다.
정부는 지난해 2,555억원의 종자돈을 대고 민간자금을 끌어들여 총 1조5,000억원을 벤처에 지원했다. 각종 세제 혜택도 쏟아부었다. 그러나 정부가 핵심과제로 설정했던 자동차 철강 조선 등 9개 업종의 B2B(기업간 전자상거래) 구축사업에 지원된 예산은 고작 81억원이다.
산업연구원 박중구(朴重玖) 박사는 "정부의 일방적 외끌이 전략으로 자동차 철강 등 기존 주력산업은 사실상 방치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 결과 중소ㆍ벤처기업의 연구개발(R&D) 인력(99년 기준)이 97년보다 49% 증가한 반면, 대기업은 1.7%로 거의 제자리 걸음이다.
일반 제조업체의 매출액 대비 R&D투자는 96년(2.75%) 이후 줄곧 감소해 99년 2.46%를 기록, 일본(3.89%)이나 미국(4.00%)과의 격차는 더욱 벌어졌다. 기술개발에 대한 투자와 지원이 줄면서 자동차ㆍ전자기기ㆍ기계ㆍ정밀기기 부품의 대일(對日) 무역적자도 최근 2~3년 동안 최고 2배까지 늘어났다.
'나홀로 산업기술정책'도 문제였다. 기업이나 연구기관의 국제 공동연구사업에 대한 정부 지원은 97년 이후 계속 줄어 지난해 과기부(기초과학) 산자부(응용기술) 통틀어 140억원에 불과했다. 과기부 관계자는 "외국과 공생하며 전략적 국제화를 도모해야 한다는 개방화시대 사고방식이 크게 부족하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산업경쟁력 제고를 위해서는 산업간ㆍ기업간ㆍ국가간 퓨전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도록 산업정책의 중심축을 전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LG경제연구원 권혁기(權赫基) 박사는 "IT ㆍBT의 육성정책은 바람직하지만 특정산업에 속한 기업들에만 모든 자원을 획일적으로 몰아주는 것은 곤란하다"며 "전통산업도 ITㆍBT와의 퓨전 효과를 발휘하면 신산업인 만큼, 우리 경제의 대안 모색도 자동차 반도체 등과 같은 기존 주력산업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유병률기자 bryu@hk.co.kr
■외국기업들 퓨전전략
우리나라 기업들이 지난 3년간 구조조정과 다운사이징에 집중하고 있을 때 세계적 기업들은 퓨전과 성장 전략으로 경쟁력을 제고했다.
일본 최대의 자동차업체 도요타는 제품 설계단계에서 외부 IT분야 엔지니어를 참여시키는 '디자인-인(Design-in) 전략'을 통해 신차 설계에서 양산까지 소요기간을 20개월에서 12개월로 단축했다.
국내 자동차업체(평균 27개월 소요)보다 1년 이상 빨리 소비자들의 구미에 맞는 신차를 내놓는 셈이다. 도요타는 또 일본 IT업계 2위인 'KDDI사'의 2대주주가 되면서 차 안에서 인터넷을 이용할 수 있는 기술을 공동 개발, 이를 곧 상품화할 예정이다.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핵심자산이라고는 파이프라인뿐이던 미국의 천연가스 수송업체 엔론은 90년대 중반 '엔론온라인(Enron-Online)'이라는 전자상거래 시스템을 구축하면서 세계적 무역중개업체로 탈바꿈했다. 현재 이를 통해 하루 평균 900건의 천연가스 석유 전기 등 에너지제품들이 거래되고 있다.
GM 포드 다임러크라이슬러 세계 3대 자동차 메이커는 연간 2,500억달러의 부품조달비용을 절감하고, 자동차 가격의 25%에 달하는 판매비용을 줄이기 위해 지난해 3월 전자상거래 시스템인 'covisint.com'을 공동 구축하기로 했다.
일본 가전업체인 소니는 영화ㆍ음악ㆍ게임ㆍ오락 등의 정보통신 컨텐츠 분야를 중심으로 'e- 소니'로의 대대적인 변신을 도모하고 있다.
이밖에 마이크로프로세서 분야에서 세계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인텔은 서버 개발업체, 네트워크 장비업체, 영상데이터통신 개발업체 등 총 300개의 중소기업과 기술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다. 우리나라 대기업들이 대부분 투자목적으로 벤처지분을 보유하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유병률기자
bryu@hk.co.kr
■김광두 산업발전심의위원장 인터뷰
김광두(金廣斗ㆍ서강대 교수ㆍ사진) 산업발전심의회 위원장은 "우리나라 산업경쟁력이 위기를 맞게 된 것은 외환위기 이후 산업정책이 사실상 실종됐기 때문"이라며 "기술개발과 인적자본 육성을 통해 주력 제품을 고부가가치화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_정부의 산업정책을 평가한다면.
"구조조정이 재무구조 개선에만 초점을 맞춤에 따라 기업들이 고부가가치화를 위해 투자를 늘리기보다 당장의 부채비율을 줄이는데만 급급했다. 외환위기 초기에는 급한 불을 끄기위해 불가피했지만, 위기를 벗어난 이후에도 구조조정과 산업정책은 조화를 이루지 못했고 산자부의 목소리는 어디에도 없었다."
_벤처정책은 성공적이었나.
"ITㆍBT 육성이라는 중장기적 안목보다는 일자리 창출이라는 단기적 목적이 강조된 나머지 정부가 당장의 실적과 성과에만 치중하게 됐다. 이 결과 벤처지원이 국가경쟁력 강화로 이어지지 못했다. 자금지원도 공적자금이 줄줄 새듯 비효율적으로 집행된 경우가 많아 기업의 도덕적 해이를 조장했다."
_기술발전을 위한 핵심과제는.
"국내외 기업간 국제컨소시엄 구성 등 전략적 제휴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러나 국내 기업들은 아직도 외국 기업들에 하나부터 끝까지 모든 기술을 달라는 식이고, 관료주의는 여전히 외국기업들이 한국에 대한 투자를 꺼리게 하는 가장 큰 요인으로 꼽힌다."
_향후 산업정책의 방향은.
"우리나라 대표주자가 ITㆍBT가 돼야 하느, 아니면 자동차 조선 등 기존 주력산업이 돼야하느냐의 문제는 기업과 시장이 판단할 문제이고 정부는 시장에서 인정받는 기업이 기술개발에 전념할 수 있도록 여건을 조성하면 된다.
유병률기자
bryu@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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