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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세이 유라시아 천년/(16)몽골제국의 출현과 로마교회의 대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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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세이 유라시아 천년/(16)몽골제국의 출현과 로마교회의 대응

입력
2001.01.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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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는 건설된 지가 3,000년이 가까운 '영원의 도시'라고 하지만 중세에는 고대의 광채를 상실하고 있었다.제국의 수도가 콘스탄티노플로 옮겨진 뒤로 중세 초에 로마의 인구는 수천 명을 넘지 못했고 많은 유적들은 잡초에 휩싸였다.

8세기 이후 교황의 권위가 높아지면서 중요성을 되찾았지만 10~12세기에 조차도 인구가 1만 명을 넘지 못했다. 사라센이나 노르만의 잦은 침입을 받았고 지방세력들의 다툼은 유혈사태를 빚곤 하였다.

이 시기 교황의 궁전은 로마 동쪽의 산 지오바니 대성당 옆에 있었고, 로마의 서쪽에 있는 바티칸에는 당시에는 베드로의 순교를 기리는 바실리카 양식의 성당이 있었지만 쇠락하였다.

우리에게 익숙한 산 피에트로(성 베드로) 대성당을 비롯한 엄청난 규모의 건조물은 교황이 아비뇽에서 옮겨온 이후인 르네상스시기에 만들어진 것들이다.

로마는 이번 탐사의 맨 서쪽에 위치한다. 우리가 로마를 유럽의 기착지로 택한 이유는 몽골제국의 시기에 로마교황이 유럽을 대표할만한 자격을 지녔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14세기초에 라시드 웃딘이 쓴 몽골제국의 세계사인 집사(集史)의 '프랑크사'편은 로마교황을 단연 유럽 최대의 권력자로, '프랑크왕'인 루이9세를 그에 다음 가는 권력자로 그리고 있다.

서구 유일의 황제인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의 힘은 몽골인의 눈에는 보잘것없는 존재로 비쳐졌던 것이다.

하지만 칭기즈칸의 손자인 바투가 러시아를 점령하고 폴란드 독일기사단의 연합군과 헝가리군을 연파하던 1240년 당시의 유럽은 분열되어 있었다.

13세기초의 이노켄티우스3세(1198~1216)에 이르러 교황권은 모든 면에서 권세의 절정에 도달했지만, 새로이 황제위에 오른 프리드리히2세(1215~50)는 여러 면에서 걸출한 인물로서 교황의 가장 무서운 적이 되었다.

그는 당시로는 드물게 종교적 관용을 알았던 매우 근대적인 사고방식의 소유자로서 시칠리아에 절대군주제를 건설하고는 이를 바탕으로 정력적인 이탈리아 정책을 추진하였다.

교황 이노켄티우스4세(1243~54)가 '타타르족의 위험'에 대비하고 황제의 폐위를 결정하기 위하여 소집했던 공의회를 리용에서 개최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프리드리히의 영향력 때문이었다.

황제와 교황의 대립에서 교황이 승리를 거두고 호헨슈타우펜 가문이 종말을 고했지만, 교황의 '바빌론유수'(1309~76)가 보여주듯이 최종적인 승자는 새로이 등장하던 영방국가(領邦國家ㆍ중세 유럽에 국왕이 일정한 영역에서 단일한 지배권을 행사하던 나라)였다. 프랑스의 루이9세는 이 세력을 대변하였다.

1237년 바투의 서방원정군이 러시아에 나타났을 때, 이 소식은 유럽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헝가리의 벨라4세는 교황 그레고리우스9세(1217~41)에게 원군을 청했지만, 그가 바라는 유럽연합군은 실현될 수 없었다.

당시 영국인 매튜 패리스의 대연대기는 유럽인들이 받았던 충격과 공포를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기독교세계에 행운은 서유럽이 유라시아의 극서에 위치하여 파국을 면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몽골인들이 언제 다시 침입할 지 알 수 없었고, 게다가 도대체 그들이 누구고 어디에서 왔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몽골제국의 등장이 유럽에 악몽만을 가져다 준 것은 아니었다. 기독교세계는 일단 몽골의 충격에서 회복하자 그것에서 새로운 전망을 발견하였다.

로마교회와 여러 군주들은 몽골족이 세계사의 무대에 등장한 것을 아시아를 기독교로 귀의시키고 특히 협공작전에 의해 이슬람교와 투르크족을 괴멸시켜 성지를 회복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보았던 것이다.

이들의 기대는 두 가지 확신에 근거하였다. 하나는 역사적 사실로서 몽골인들이 실제 바그다드의 칼리프를 멸망시키고 500년에 걸친 압바스조를 무너뜨렸던 것이다.

적의 적은 동지라는 발상이다. 다른 하나는 이른바 '사제 요한(Prester John)의 전설'이다.

적인 이슬람의 뒤쪽 저 멀리 아득한 동방에 기독교도의 나라가 있는데, 그 우두머리인 요한이 페르시아의 수도를 함락하고 예루살렘을 향해 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기독교인들에게는 놀랍게도 몽골의 지배층이 종교적으로 퍽 관대하다는 점이 그들의 기대를 더욱 높였다.

이리하여 로마교황은 몽골의 위협에 대처하고 성지를 탈환하기 위하여, 즉 적정을 살피고 아시아를 개종시키기 위하여 여러 차례 공의회를 소집하는 한편 사절단을 파견하였다.

종교심에 불타 올랐던 루이9세도 몽골의 지원을 바라고 적어도 두 차례나 몽골의 칸에게 사람을 보냈다.

동방에 파견되었던 이들은 주로 13세기초에 탄생한 두 탁발교단인 프란체스코회와 도미니쿠스회의 수사들에게서 충원되었다.

교황 이노켄티우스 4세의 공식사절 카르피니(여행기간 1245~47), 루이9세의 비공식사절 기욤 드 뤼브룩(1253~55), 중국에 파견되어 대도의 대주교가 된 몬테코르비노(여행기간 1291~1328), 또다른 교황사절 마리뇰리(1338~42) 등은 프란체스코 수사였고, 이노켄티우스의 또다른 공식사절 아스켈리누스(1247~48), 루이9세의 공식사절 롱쥐모(1249~51) 등은 도미니쿠스 수사였다.

두 수도회의 선교지역이 각기 동유럽과 중동이었기 때문에 전자는 주로 흑해와 남부 러시아를 통해, 후자는 지중해와 이란을 통해 몽고와 중국에 이르렀다.

다만 몬테코르비노와 마리뇰리는 몽고세계의 주도권 다툼으로 중앙아시아의 길이 막히자 인도와 남지나해를 거치는 해상로를 이용하였다.

기독교세계의 접촉 노력에 대해 몽골 역시 무감각하지 않았다. 비록 몽골이 이들 사절들을 조공을 드리는 사신으로 보는 우월의식을 견지하기는 했지만 이들에게 호감을 보였고 심지어는 포교활동을 지원하기도 했다.

게다가 몽골은 여러 차례 답방의 형식으로 교황과 군주들에게 사절을 보내 예컨대 랍반 사우마(1287~88)는 교황 니콜라스 4세, 프랑스의 필립4세, 영국의 에드워드1세 등을 만나고 마르코 폴로의 여행기에 걸맞는 일종의 '서방견문록'을 저술하기도 했다.

크게 보아 기독교세계의 의도는 대부분 실현되지 못했다. 몽골 지배층은 기독교로 개종하지도 않았고, 몽골의 지원을 받아 성지를 탈환하기는커녕 1291년에는 팔레스타인 지방의 마지막 거점인 앗코(아크레)마저 상실하였다.

애초 여러 종교의 공존과 상생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던 서방으로서는 개종의 가능성을 과신하였으며, 이후 금장한국과 일한국의 지배층이 이슬람으로 개종함에 따라 성지수복의 꿈은 결정적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몽골의 평화'는 동서교류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서구는 전설로만 접해오던 동방을 직접 만났고 인식의 지평을 크게 확대하였다. '사제 요한'을 아시아에서 발견하는데 실패한 그들은 그가 아프리카의 에티오피아에 있을 것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14세기 중엽에 몽골의 세계가 파편화되고 극서의 유럽과 극동의 중국이 이슬람이라는 중간지대를 놓고 각기 '닫힌' 세계로 돌아선 뒤에도 동경과 공포의 대상으로서의 동방의 이미지는 살아남았다.

몽골시대는 갔어도 동방의 부라는 매력은 여전히 유럽을 사로잡았다. 1492년 콜롬버스가 대서양을 건너 서방항해에 올랐을 때, 그는 '지팡구'나 '인도'가 아니라 대칸인 쿠빌라이가 지배하는 동방의 대제국을 찾아 나섰던 것이다.

최갑수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로마신전 위에 세워진 교회

로마는 도시 전체가 박물관이라 할 정도로 곳곳에 유적, 유물이 널려있다. 그중 로마의 오랜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장소로 산 클레멘테성당 만한 곳이 있을까.

12세기에 지어진 화려하고 거대한 이 성당은 지하로 내려가면 과거가 나타난다. 사람들이 미사를 보거나 벽화를 감상하고 있는 지상층에서 한 층 아래로 내려가면 4세기에 지은 교회가 있다.

이 교회는 크림지방으로 추방돼 닻에 묶여 물에 빠져 죽은 4대 교황 성 클레멘트를 기리기 위해 지어졌다.

여기서 한 층을 더 내려가면 미트라신전을 포함한 고대로마시대의 건물이 있다.

태양ㆍ정의ㆍ계약ㆍ전쟁의 신인 미트라를 숭배하는 미트라교는 기원전 1세기 페르시아에서 수입됐는데 4세기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받아들일 때까지 로마에서 꽤 번창했었다.

미트라교를 숭배하는 이들은 이 신전에서 예배를 보는 등 종교 행사를 열었다. 지금은 빛이 전혀 들지않아 백열등마저 없었다면 앞 뒤 분간이 어려울 정도이다.

입구는 제법 넓지만 복도는 폭이 1㎙가 채 되지 않을 정도로 좁고 그 사이로 종교적 연회를 열기 위한 방이 여러 개 있었다.

방중 하나에는 미트라신이 조각돼있는 식탁의 돌받침이 남아있어 이곳이 미트라신전임을 알게해 준다. 입구의 벽화가 과거의 영화를 어렴풋이 일러줄 뿐 구멍같이 좁은 출입구와 미로 같은 복도, 방을 구분하는 벽만이 남아 지금은 감옥과도 같은 인상이다.

게다가 그렇게 많은 관광객들도 미트라신전까지는 잘 내려오지 않아 타임머신을 타고 옛날로 돌아온 듯한 착각에 빠져들었다.

함께 간 최갑수 교수는 "유일신을 섬기는 기독교가 미트라 신앙의 성소를 파괴하지 않고 그 위에 교회를 지은 것은 참 특이하다"고 말했다.

박광희기자 kh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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