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수아 소설을 이야기하자니 여러 가지로 찜찜하다. 허구한 날 여자들 소설이냐는 반문과 그것도 소설이냐는 이죽거림이 들리는 듯하다.처음의 반응이야 예술을 논하는 데 성비(性比)가 웬 말이냐는 우문우답이 제 격이겠지만 문제는 그 다음이다.
그녀의 소설은 여전히 문학적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녀의 소설에 비판적인 사람들은 대개 문장력 미숙이나 부질없는 감상성 등을 지적하는 경우가 많다.
소위 '기본기'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기본이 작품을 지나치게 규격에 들어맞도록 강제할 때도 있다.
변화된 리얼리티를 포착하고 가족 공동체를 비롯한 우리 사회 전반의 위선을 까발리는 비주류적 상상력을 발휘하기에 우리가 알고 있는 그 기본의 공간은 때로 지나치게 협소하기도 하다.
그녀의 최근작 '우이동'('세계의 문학' 2000년 겨울호)은 이 점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준다.
여전히 그녀의 시제 처리는 불안정하다. 현재시제는 어색하기 짝이 없고 회상은 방해받는다. 거친 문장들도 그렇다. 서툰 구어투 표현이 소설에 대한 몰입을 돕기는 만무하다.
그러나 이 소설에는 이런 원론적인 불평들을 잠재울 만한 빛나는 대목이 여럿이다.
"경수는 아버지를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도저히 숨길 수 없는 그런 장남들 중의 한 명이었다"와 같은 문장에 묻어나는 묘한 달관이나 "미혜가 학생과 관계를 가진 것은 환수가 두번째였다"와 같은 돌발적이고도 과감한 위반적 상상력, 그리고 "환수는 방문으로 부엌을 내려다보았다.
푸른 타일을 깐 부뚜막에 앉아서 석유풍로 위에 끓고 있는 생선 찌개의 간을 보던, 이제 곧 죽을지도 모르는 미혜가 미소를 지었다"에 드러나는 생의 비애, 그 어찌할 수 없는 허무 등은 '배수아'가 아니면 도저히 포착하기 어려운 그녀만의 성좌(星座)다.
서로 삐걱이며 불화하는 가족 구성원 각자의 성격 묘사도 탁월하다. 구두쇠이자 지독한 보수주의자인 가장 엄희만과 그녀의 무지한 처, 유약한 장남과 일찍 절망을 알아버린 딸, 그리고 헛된 열정에 목을 매고 있는 막내아들 등 이들 가족은 가난과 무지와 권태와 소외를 대변한다.
그러므로 "가족으로 구성된 이후 한번도 오락이라는 것을 가져본 기억이 없"는 이들 가족의 소풍은 그 자체 아이러니다. 그것은 축제이기는커녕 그들의 벌레스러움을 확인시켜주는 계기일 뿐이다.
무엇보다도 전율스러운 것은 이 가족에게서 우리의 비루한 얼굴을 보게 된다는 점이다. 이 소설은 말하자면 배수아식의 후일담이다.
그녀는 1979~80년의 '역사'를 무더운 여름 아침, 평소 말 한마디 없던 가족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아무 것도 볼 것 없는 우이동 계곡으로 소풍가는 부조리한 비애에 견주고 있다. 그랬던가. 사후적으로 보자면 그랬다.
계곡에 발 담그는 그 찰나를 제외한 대부분의 시간 우리는 다만 찌는 듯한 무더위에 방치됐을 뿐이다.
그녀가 '아버지'와 '정치뉴스'를 제일 싫어하는 이유를 알겠다. '아버지'들이 배수아를 싫어하는 이유도. 그러나 우리 소설은 배수아 소설과 더불어 역사를 말하는 또 다른 목소리를 갖게 되었다.
그녀는 아무 것도 이야기하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이야기하는 '복화술'을 충분히 구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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