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양적팽창 '일류' 기술.브랜드투자 '삼류'"한국경제의 위기는 기술 경쟁력 부족에서 비롯됐다. 그런데도 정부ㆍ기업 모두 구조조정과 개혁만 외칠 뿐 기술의 빈곤은 언급도 하지 않는다."(한경연 박승록 경제발전연구센터 실장) "한국 내에서 통하는 기업은 많지만 핀란드의 노키아나 스웨덴의 에릭슨처럼 세계적인 기업이 없다."(일본 경제평론가 오마에 겐이치)
브랜드와 기술을 도외시한 '껍데기 성장'집착증이 우리 산업을 종이호랑이로 만들고 있다.
기업마다 생산ㆍ판매ㆍ수출 등 양적 지표의 영토 넓히기, 외형 부풀리기에 급급한 결과 품질ㆍ연구개발ㆍ브랜드파워 등 질적 구조는 뒷전으로 밀렸다.
외환위기 이후 3년간 30대 대기업 중 대우를 포함한 14개 재벌이 망하거나 오너가 바뀌었다. 상품과 기술보다는 차입경영에 기초한 문어발 확장만 해오다 '자기변혁'마저 실패한 결과다. 살아남은 기업들도 선진 기업을 따라잡을 엄두도 못낸 채 재벌개혁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있다.
한국 자동차산업의 대표주자인 현대차가 세계 선진 메이커들이 합종연횡과 신기술 개발로 앞서가는 사이 경영권 교체, 형제 갈등의 후유증을 겪느라고 세월을 허송한 것은 대표적 사례다.
산업기술진흥협회자료에 따르면 지난 2년간 국내 대기업의 연구개발비 삭감액은 평균 15%.수천명의 두뇌가 자리를 잃고 일부는 경쟁국인 대만 등으로 옮겨갔다.
기술개발의 질적 수준을 가늠하는 과학기술부문 경쟁력은 95년 세계 24위에서 98년 28위로 4단계 떨어졌다.
과학기술부 분석에 따르면 한국이 보유한 세계 최고기술은 30여개에 불과, 4,000여가지에 이르는 전세계 최고 기술의 1%도 안된다.
세계에서도 알아준다는 삼성전자의 브랜드가치는 52억달러. 세계 1위 코카콜라(838억달러)에 비해 16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 돈은 빌려와도 고부가가치 상품을 만드는 기술력과 브랜드는 빌려올 수 없다.
대한상의 엄기웅 상무는 "인력감축과 재무구조 개선 등 고전적인 구조조정 패러다임에서 탈피해 선택과 집중을 통해 사업 및 제품 포트폴리오를 재구성하고 핵심 주력사업 위주의 기술개발과 브랜드파워 투자를 서둘러야 한다"고 말했다.
김호섭기자 dream@hk.co.kr
■현대자동차는 지난해 11월 국내 최초로 승용형 디젤엔진을 개발했다고 야심차게 발표했다. 소음과 진동이 심한 기존 2밸브 저압 간접분사방식의 디젤엔진을 4밸브 고압 직접분사방식으로 바꾼 이 엔진을 장착한 싼타페와 트라제XG는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하지만 핵심 기술인 고압직접분사장치는 독일 자동차부품사인 보쉬에서 사와 엔진 한 대를 만들 때마다 수백달러의 기술료를 보쉬에 지불해야 한다.
대우자동차는 레간자와 매그너스 엔진(1,800cc, 2,000cc)을 아예 호주 홀덴사에서 가져와 조립한다. 쌍용자동차의 체어맨과 이스타나에 장착한 엔진과 트랜스미션은 독일 벤츠제품으로 쌍용이 아무리 차를 잘 만들어도 벤츠사가 정하는 지역에는 수출조차 할 수 없다.
한국차의 최고급 도료는 프랑스 기술이 필요하고, 특수재질ㆍ특수규격 철강은 일본에서 수입해야 한다. 르노-삼성차 SM5는 엔진룸에 들어가는 볼트와 너트까지 일본에서 들여온다.
한국자동차공업협회 김소림 부장은 "국내 중소형 자동차의 세계 경쟁력은 높지만 엔진섀시와 트랜스미션 등 기술축적이 필요한 핵심부품산업의 경쟁력은 모두 세계 20위권 밖"이라고 지적한다. 대만에서 도로 위를 달리는 차는 대부분 일제차지만 보닛을 열어보면 대만부품이 많은 것과는 대조적이다.
부품과 설비의 빈곤은 자동차에만 그치지 않는다. 제2의 반도체 신화를 열고 있는 TFT- LCD(박막액정표시장치). 완성품은 모두 국산이지만 이 제품을 만드는 공장의 설비는 100% 일본제다. 소재 의존도도 높아 생산 원가의 65%를 일본에 지불하고 있다.
삼성이나 LG가 아닌 일본산 설비와 소재에 신화를 기대하는 셈이다.
새로운 수출주력품목으로 떠오른 휴대폰도 마찬가지다. 생산원가 250달러 중 140달러가 특허료 명목 등으로 미국의 몫이다.
우리의 수출주력 품목은 수입유발 품목과 거의 동일하다. 1988년 국가 전체의 자본재 대일 무역수지는 72억달러 적자. 전체 무역적자액을 웃돌았다. 전체 수입 중 부품소재의 비중은 94년 19.7%에서 99년 28.3%로 해마다 높아지고 있다.
한국과학기술원 경종민 교수는 "우리 기업들은 다 익은 과일만 따려고 야단일뿐 나무를 심는데는 관심이 없었다"고 지적한다.
자동차의 경우 일본 업체들은 니혼덴소나 아이신 같은 전문 부품업체를 적극 육성했지만 한국업체들은 오히려 부품업체가 커지는 것을 막아왔다. 과거 만도기계나 성우 같은 대형 부품업체는 모두 친족기업으로 경쟁에 따른 발전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다.
"부채비율을 아무리 낮춰 살아나면 뭐합니까. 세계시장에 내놓을 경쟁력있는 기술과 상품이 없는 걸요." 한 대기업 임원의 자조 섞인 이 말은 기업 경쟁력의 현주소를 잘 말해준다.
21세기의 문턱에서 방황하는 한국 산업. 분명한 것은 지식과 기술이 배제된 양적 팽창은 더 이상 고용도, 성장도, 수익도 가져다주지 못한다는 점이다.
김호섭기자
dream@hk.co.kr
■ 박승록 한국경제연구원 경제발전연구센터 실장
"국가 산업경쟁력의 원천은 핵심 업종ㆍ주력 기업의 시장 경쟁력이며, 기업경쟁력을 결정짓는 것은 바로 CEO(최고경영자)의 혜안입니다."한국경제연구원 박승록 경제발전연구센터 실장은 우리 산업경쟁력의 위기를 기업들의 핵심 기술개발 미진과 CEO의 결단을 방해하는 시장환경에서 찾는다.
-우리 산업의 경쟁력이 취약해진 원인은.
"한국경제를 지탱하는 힘은 기술 등 질적 기둥이 아니라 양적 팽창이었다. 기업들이 경쟁력 원천인 기술을 외면하고 한눈을 팔아왔다. 부품과 소재분야의 기술개발 노력을 했다지만 미진했고 눈앞의 수확에만 너무 집착했다."
-경쟁력 있는 기술과 상품은 없는가.
"수출주력 상품의 포트폴리오가 다양하지 못하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5대 품목 의존도가 21.6%나 된다. 반도체와 자동차를 빼면 먹고살 수 없다는 얘기다.
그나마 원천기술과 핵심 기계장비는 모두 외제다. 외국의 자본재를 들여와 값싼 인력을 투입해 조립 가공하는 수준이다.
우리 경제가 일본을 모방해 왔다지만 정작 기술력에서 앞선 일본업체와의 제휴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정부 규제도 많았고 노동시장의 경직성, 국민정서와 기업의 노력부진 등이 원인이다."
-산업경쟁력 강화를 위해 기업들이 할 일은.
"지금은 반도체가 효자상품이니까 박수를 치지만 80년대 삼성의 반도체사업 진출은 도박이었다. 비난도 많았다. 기업의 신사업 도전을 무조건 문어발확장이라고 비난해서도 안된다. 중요한 것은 기업의 전략과 합리적 의사결정, 그리고 CEO의 혜안이다."
-시장여건과 경제 시스템에 문제는 없는가.
"새로운 산업을 육성하려면 10~20년 후를 내다보고 해야 하는데 대기업의 진출은 묶여 있고 은행은 투자를 하려하지 않는다.
자본조달이 힘들고 각종 견제장치 때문에 오너가 모험을 할 수도 없다. 기업이 디지털 혁명이라는 트랜드를 따라가야 하지만 모든 업체가 그곳에 투자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투자의 차별화가 필요하다."
김호섭기자
dream@hk.co.kr
■농심라면.진로소주 '세계적 국산''
제 2의 코카콜라에 도전하라.' 라면, 소주, 초코파이, 오토바이헬멧 등 수십년의 연구개발을 거쳐 내수에 성공한 '한국적' 상품이 해외에서 세계적인 브랜드로 재탄생하고 있다.
농심은 지난해 미국, 중국, 일본 등 세계 라면시장에서 7,200만달러어치를 팔았다.
20년전 처음 해외 진출할 당시 수출액의 140배다.
지난해 5월에는 라면 종주국인 일본의 냉동식품전문업체 '가토기치'에 '신라면'의 스프를 역수출한 것을 계기로 '맛의 경계'를 뚫고 세계인의 입맛에 접근해가고 있다.
소주업체 진로는 화의상태에도 불구하고 영문브랜드 'JINRO'로 일본에 진출한 지 18년만인 98년 다카라주조의 '준'을 이기고 1위 브랜드로 올라섰다.
올해 수출액 6,300만달러 중 90%를 일본에서 거둬들였다.
기술연구소 이석준 소장은 "담백한 음식에 칵테일로 소주를 즐기는 일본인의 입맛에 맞게 무취 드라이타입을 택한게 성공 비결"이라고 말했다.
동양제과 '오리온 초코파이'는 90년대 중반부터 패스트푸드의 발달로 내수전망이 불투명해지자 베트남 등 동남아와 중국, 러시아 등 당류를 즐기는 나라에 '포만간식'(끼니용 간식)으로 접근했다.
해외마케팅 팀 강원기(44) 상무는 "전략시장으로 지저되면 수입상과 도매상, 소매상까지 일괄적으로 관리하는 브랜드 중심의 유통망을 구축해 일찍 시장을 개척할 수 있었다"고 털어놨다.
30년간 헬멧 제조에만 전념해온 경기 용인의 홍진크라운은 종업우너 270명의 중소업체지만 1993년부터 고유브랜드 'HJC'로 일본과 이탈리아 업체들을 제치고 북미 헬멧시장을 평정했다.
탁월한 안전성을 인정받으면서 지난해에만 6,200만달러를 벌어들였다.
박은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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