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최재천의 자연과 세상] 경제규제 '불가사리'만큼만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최재천의 자연과 세상] 경제규제 '불가사리'만큼만

입력
2001.01.15 00:00
0 0

얼마 전 우리 재계에 상상도 못할 일이 벌어졌다. 제일은행이 금융감독원의 협조 요청을 거절한 것이다. 금융감독원이 어떤 곳인가. 이를테면 염라대왕이 아닌가. 물론 엄정한 기준에 따라 하는 일이겠지만 금융감독원의 퇴출 판정은 그야말로 염라대왕의 호출이다. 말이 협조 요청이지 사실 불호령인데 한낱 시중은행 주제에 그걸 거절하다니. 범 무서운 줄 모르는 하룻강아지가 아니고 무엇이랴.보험이나 은행은 사실 망하기 힘든 사업이다. 지출해야 할 보험금보다 조금 넉넉하게 보험료를 책정하기만 하면 되는 게 보험이고 고객이 맡긴 돈을 더 높은 이자로 빌려주기만 하면 결코 망할 수 없는 게 은행일 텐데 우리 나라 보험회사와 은행들은 어떻게 망하는지 신기할 뿐이다. 더군다나 우리 나라 은행들은 확정금리가 아니라 그 때 그 때 자기들에게 유리하도록 변동금리를 적용하고 있는데 왜 망하는 것일까.

이렇듯 엄청난 노력을 기울여야 망할 수 있는 금융기관들이 망하는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외부의 압력 때문일 것이다. 권력이나 친분의 침을 바른 수많은 입들이 늘 그들의 귓전에 맴돌며 합리적인 결정을 방해한다. 이윤이 보장되지 않거나 심지어는 도산이 거의 확실해 보이는 기업에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대출을 하며 어떻게 온전하길 기대하는가. 뜯길 걸 뻔히 알면서 돈을 빌려줄 수밖에 없는 고리대금업자들이 우리네 금융기관들이다.

정부규제 적정선 찾기 딜레마

물론 국가 경제 전반을 살피며 조정작업을 하는 것이 금융감독원의 임무이겠지만 기업의 입장에서는 그들의 개입도 엄연한 외부 압력이다. 외국기업들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일 것이다. 현재 제일은행의 대주주가 외국 기업이라는 사실과 이번 반란은 결코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앞으로 점점 더 많은 우리 금융기관들이 외국 기업의 손에 넘겨질 텐데 금융감독원의 서슬이 언제까지나 시퍼럴 수 있을까 의심스럽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경제전문가들로부터 모든 걸 자유경쟁 시장체제에 맡겨야 한다는 얘기를 자주 듣는다. 하지만 그 어느 자본주의 국가도 경제를 완벽하게 자유경쟁체제 속에 내버려두는 곳은 없는 것 같다. 미국의 법무부가 얼마나 끈질기게 마이크로소프트사의 독점을 저지하느라 애썼는가 우리 모두 지켜보았다. 어쨌거나 규제가 적은 경제일수록 성공적인 것만은 틀림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정부의 규제는 과연 어느 선이 적절한 것일까.

생태학을 하는 사람이 감히 경제 문제에 이러쿵저러쿵 할 수 있으랴만 흥미로운 생태학 개념이 있어 소개하고자 한다. 바닷가 바위 틈 물웅덩이에 서식하는 해양동물들의 군집에서는 대개 불가사리가 가장 높은 포식자의 위치를 차지하고 다른 동물들을 잡아먹으며 산다. 그래서 언뜻 생각하기에 불가사리들만 제거하면 그들에게 잡혀 먹히던 동물들이 모두 보호되어 군집이 보다 풍요로워질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다.

인위적 퇴출 시장건강 해쳐

그러나 이미 수십 년 전 미국 워싱턴 주립대학의 유명한 생태학자 페인(Robert Paine) 교수는 다음과 같은 실험을 수행했다. 바닷가 웅덩이 군집들을 두 부류로 나누고 한쪽 부류의 웅덩이에서는 계속 불가사리를 제거했고 다른 부류의 군집들은 그대로 두었다. 실험과학에서는 첫째 군집들을 실험군이라 부르고 둘째 군집들을 대조군이라 부른다. 얼마간 시간이 흐른 뒤 두 부류의 군집들에 얼마나 다양한 종들이 살고 있는가를 비교했다. 결과는 뜻밖이었다. 흉악한 포식동물을 제거한 군집에 대조군보다 훨씬 적은 수의 종들이 살고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불가사리를 제거한 군집에서는 남아 있는 종들간의 경쟁이 더욱 심해졌고 그 결과 가장 번식력이 강한 몇몇 종들이 다른 종들을 밀어내고 천하를 평정해버리고 만 것이다. 불가사리는 워낙 먹성이 좋아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잡아먹는다. 따라서 번식력이 강해 흔한 종일수록 많이 먹힐 것이고 희귀한 종들은 그만큼 덜 먹히므로 모두 고르게 분포하게 된다. 언뜻 보기에는 이런 저런 동물들을 잡아먹어 사악해 보이는 포식자가 사실은 세상을 더욱 풍요롭게 만든다.

정부가 할 일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바로 불가사리의 역할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시장을 너무 지나치게 자유로이 방치하면 황량한 약육강식의 세상이 될 가능성이 높다. 월등하게 우수한 한 기업이 시장을 독점하면 결국 소비자가 골탕을 먹는다. 자연생태계나 시장경제계나 할 것 없이 다양성을 잃으면 구조적으로 불안정해진다. 그러나 불가사리는 결코 씨를 말릴 종들을 미리 결정하지 않는다. 정부의 간섭도 기업들로 하여금 자유롭게 경쟁할 수 있는 시장환경을 확보하는 수준에서 멈춰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생태학적으로 볼 때 인위적인 기업 퇴출은 결코 시장을 건강하게 만들지 못할 것 같다.

한 나라의 국가경제를 어떻게 작은 물웅덩이에 비할 수 있느냐고 반문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프리카의 초원들 중 코끼리가 사라진 곳에서는 그 광활한 지역이 온통 한 두 종의 나무들로 뒤덮이는 것도 생태학자들은 보았다.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

jcchoe@sun.ac.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