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린턴 미 대통령의 유감 표명으로 한국전쟁 때 발생한 노근리 사건은 반세기 만에 '미군에 의한 양민학살 사건'으로 역사적인 재 조명을 받게 됐다.1960년대부터 미국을 향한 '외로운' 싸움을 해 온 노근리 주민들은 비로소 명예를 회복했고 소송을 통해 보상을 받을 수 있는 단초를 마련했다. 또 한미 양국은 SOFA 개정협상에 이어 노근리 사건 까지 마무리, 민감한 핵심 현안을 클린턴 대통령 임기 내에 일단락 지었다.
조사결과 발표까지는 여러 차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지난해 11월 브루나이 APEC 회담에서 김대중 대통령과 클린턴 대통령이 조속한 시일 내에 결론을 낼 것을 합의하는 등 양국 정상의 관심과 진지한 접근 자세가 가장 큰 추동력이 됐다.
진상조사 결과와 사후대책은 '절반의 성공'이라는 평이 지배적이다. 당초 목표로 삼았던 미 정부의 직접 배상은 미측이 "사법부에서 처리할 일"이라고 완강히 버텨 이뤄지지 못했다.
그러나 미 재향군인회 등 보수층의 반발 여론을 배경으로 '실체조차 인정할 수 없다'고 버티던 미 정부를 상대로 '대통령 유감 표명'이라는 외교적 성과를 이끌어 냈다. 전쟁 중 벌어진 사건에 대해 미군의 최고 통수권자가 유감을 표명한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그러나 이 같은 성과에도 불구, 진상규명 작업은 '50년의 벽'을 넘지 못한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핵심 쟁점인 미군 지휘부의 발포 명령, 항공 폭격 여부에 대해선 이를 입증할 명백한 증거를 찾지 못했다.
우리측은 '고의적인 학살 행위'로 결론을 내리지는 못했지만 공동발표문에 당시 공중폭격 지침이 담긴 '로저 대령 메모'를 명기하는 등 피해 주민들이 미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할 경우 유리한 단서들을 다수 포함시켰다. 추모비 건립과 연 30여명에 대한 장학금 지급 등을 약속 받은 것도 나름의 소득이다.
이태희기자
taeheelee@hk.co.kr
■클린턴 유감성명 전문
"본인은 미국인들을 대표해 지난 1950년 7월 하순 노근리에서 한국의 민간인들이 목숨을 잃은 데 대해 깊은 유감을 표명한다. 지난 1년여 동안 실시한 집중적인 조사는 전쟁의 비극과 전쟁이 사람들과 국가에 남긴 상처를 뼈저리게 일깨워 주었다.
비록 노근리에서 발생한 사건의 경과를 정확히 가려낼 수 없었으나 한국과 미국은 공동 발표문을 통해 인원을 확인할 수 없는 무고한 한국인 피란민이 그곳에서 죽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본인은 노근리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한국인들에게 위로를 전한다. 많은 미국인이 전쟁의 무고한 희생이라는 고통을 경험했다.
우리는 반세기가 지난 후에도 남아 있는 상실감과 슬픔을 이해하며 동정을 느낀다. 본인은 이들을 비롯해 전쟁 중에 살해된 한국의 무고한 민간인들을 위해 미국이 건립하는 추모비가 어느 정도의 위안과 함께 사건의 종식을 가져 오기를 진지하게 희망한다.
우리가 추진할 추모장학기금은 그들을 기리는 생생한 조의가 될 것이다.
우리는 한국전쟁의 희생자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한편 고통이 이 분쟁의 유일한 유산은 아니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미국과 한국의 참전 용사들은 가장 혹독한 환경에서 자유라는 대의를 위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싸워 결국 승리했다.
한국에서 진동하고 있는 민주주의와 우리 두 나라의 강한 동맹, 그리고 오늘날 양국민의 친밀감은 양국이 50년 전 함께 치른 희생을 입증하고 있다."
■ 정은용 대책위장 일문일답
'노근리 미군 양민학살 사건 대책위원회' 정은용(78) 위원장은 12일 "상부의 사격명령이 없었고 의도적인 살상이 아니라며 학살사건임을 부인하고 있는 미 정부의 발표와 유감표명은 허구로 진실을 덮으려고 하는 처사"라고 강하게 반발했다. 그는 "국제사법재판소 제소 등 강력하게 대응할 것"이라고 밝혔다.
_미국 정부의 공식 발표에 대한 입장은.
"분노가 치민다. 400명의 무고한 양민을 학살하고는 학살이 아니라고 부인하고 있다. 미국은 처음부터 공동조사를 거부하는 등 진상규명보다는 책임을 회피하는데 급급했다."
_클린턴 대통령이 유감 표명을 했는데.
"지극히 미흡하고 시기적으로도 많이 늦었다. 클린턴은 유감 표명과 사후조치로 사건의 종식을 희망한다고 말했는데 이는 우리국민의 자존심을 짓밟는 처사다. 공식 사과 수준도 아니다. 사건은 끝나지 않았다."
_미국측이 추모비 건립과 추모장학 기금을 마련하겠다고 했는데.
"노근리사건 진실규명도 안된 상태인데다 다른 지역 피해자의 규모도 모르는 상황에서 피해자 전체에 대한 추모비를 세운다는 말은 모순이다. 피해자 규명조차 하지 않고 마련되는 장학기금도 거부한다."
_우리 정부에 바라는 바는.
"노근리 대책단을 해체 한다는데 해체해선 안된다. 이제 조사보고서가 나온 시점에 불과한데 진실규명과 피해자 보상이 이뤄질 때까지 우리 정부가 적극 나서야 한다."
_향후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이 사건을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할 것이다. 이를 위해 이미 청원서를 법무부에 제출했다. 미국내 법정에도 민사소송 등 법적 대응을 할 계획이다. 미 NCC(기독교교회협의회) 등 국외 단체와도 협조하고 2월중 미국에서 민간 모의법정도 개최한다. 무엇보다 진실 규명을 위한 활동에 총력을 다할 것이다."
정녹용기자
ltree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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