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코언 미 국방장관은 11일 노근리 사건의 실체는 인정하지만 전투의 와중에 빚어진 '불행한 사고'였다는 점을 강조했다. 코언 장관의 이같은 언급은 이번 사건에 대한 미국측의 곤혹스런 입장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미국측은 처음 AP통신에 의해 사건이 보도돼 한미 공동조사에 착수할 때만해도 사건자체에 대한 인정마저 회피하려는 자세를 보였다.
미국측은 이미 AP의 보도 이전에 유족들에 의해 수차례나 제기된 소청에 따라 나름대로 자체조사를 한 바 있다.
이 과정에서 50년이나 지난 상황이어서 증거불충분으로 실체규명이 어렵다고 결론지은 바 있어 이번에도 결정적인 새로운 사실과 증언이 드러나지는 않을 것으로 판단했다.
그러나 당시 참전용사들의 고백이 잇달아 나오고 상부의 명령에 따른 조직적 학살 가능성을 입증할 만한 문서들이 추가로 드러나자 미국측은 사건은 인정하되 '조직적 학살'이 아닌 '우발적 사고'였다는 선에 매듭짓는 방향으로 선회했다.
미국측은 이같은 수준에서 지난해 한국전쟁 50주년 기념일 이전까지 사건을 서둘러 마무리하려는 자세를 견지했다.
그러나 유족의 자세가 강경한데다 김대중 대통령까지 한미정상회담에서 철저한 진상규명의 필요성을 역설함에 따라 이 사건이 외교문제로 비화될 조짐을 보이자 '선진상조사 후정치타결'이 최선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미국측은 이후 나름대로 국립문서보관소의 전사(戰史)자료를 철저히 조사하고 당시 참전용사에 대한 광범위한 증언을 청취하는 등 적극적인 입장으로 임했다.
그후 자체조사를 통해 양민 다수가 피해를 입었다는 점이 확인되면서 한미동맹관계를 해치지 않으면서 유족을 달랠 수 있는 명예로운 타협안 모색에 나설 수 밖에 없었다.
결국 미국측은 대통령의 유감표명이라는 고단위 처방을 택했다. 그러나 피해보상 문제에 대해서는 선례가 없다는 점과 참전 장병들의 사법처리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이유로 절대 불가 입장을 견지했다.
미국측은 또한 차후 민사소송에 대비해 당시의 혼란상황을 자세히 적시하고 피해자의 규모에 대해서도 견해를 달리한다는 내용을 공동발표문에 병기하는 안전판을 깔았다.
워싱턴=윤승용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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