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은 어떤 일이 있어도 지킬 겁니다. 하지만 겨울 나는 일이 걱정이에요. 일거리도 없고."11일 오전에 만난 이모(39ㆍ여)씨는 '노숙자 가장'이다. 초등학교 2학년 아들 및 6세 딸과 함께 2개월여동안 공원 등을 전전했다.
동네에서 조그만 빵집을 운영하던 남편(42)은 불황으로 장사가 안되고 빚 독촉에 시달리자 매일 폭음하면서 아들에게마저 폭력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참다못한 이씨는 남매를 데리고 집을 나왔지만 갈곳이 없었다. 이씨 가족은 서울 서소문공원에 텐트를 치고 추위를 견디다 최근에야 한 가족노숙자쉼터로 옮겼다.
이씨처럼 어린 자녀를 데리고 거리로 나선 이른바 '가족노숙자'가 양산되고 있다. 삶에 대한 의지는 누구 못지않게 강하지만 살 방도를 찾지 못하고 있는 안타까운 처지의 사람들이다.
서울의 S노숙자쉼터에서 초등학교 4학년 아들과 거주하는 K(42)씨는 서울 강남의 꽤 알려진 한식당의 주방장으로 일했다.
하지만 지난해 12월 경영난을 못이기고 문을 닫는 바람에 실업자가 됐다. 설상가상으로 부인이 전세금을 빼 가출하는 바람에 집마저 잃고 이제는 알거지 신세다. K씨는 "자살을 몇번이나 결심하고도 아들 얼굴이 떠올라 포기했다"고 말했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1월 현재 전국 6곳의 가족노숙자 쉼터에 수용중인 가족은 100여가구에 240여명이다. 거리노숙자와 서울역 영등포역 등에 산재한 '쪽방'을 돌며 잠을 자는 가족까지 포함하면 최소 500여가구, 1,000여명에 이를 것이라는 추산이다.
50여명을 수용한 서울 동작구 '살림터'는 새해 들어서만 벌써 3가구를 새 식구로 맞았다. 다른 가족노숙자 쉼터에도 입소문의가 쇄도하고 있다. 살림터 관계자는 "가장의 사업실패에 따른 입소가 가장 많다"고 귀띔했다.
가족노숙자들의 공통된 인식은 '노숙은 해도 아이와 떨어져 살 수는 없다'는 것이다.
가정해체는 막겠다는 의지다. 개별 노숙자보다 빨리 재기해야 한다는 소망도 훨씬 간절하다. 하지만 자기 몸 하나 간수하기 힘든 처지에 어린 자녀까지 딸린 노숙자가 다시 일어서기는 수백배나 더 어렵다.
선한사마리안의 집에서 6개월째 생활하고 있는 Y(40)씨는 "혼자 노숙하는 게 낫다는 생각도 여러번 했지만 초등학생 딸을 외면할 수 없었다"고 털어놓았다.
문제는 '어린 노숙자'들이 IMF 경제위기 당시의 어른 노숙자들 보다도 사회의 관심권에서 멀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정부 지원을 받고 있는 쉼터의 가족노숙자 1명당 지원금은 한끼당 1,200원이 전부다. 개별 노숙자에 대한 지원기준을 가족노숙자에게도 그대로 적용하기 때문이다.
서울 K쉼터 가족노숙자 O(41)씨는 "초등학교 5학년 아들에게 참고서 한권 사주지 못하고 있다"고 울먹였다. 특히 일부 자녀는 장기간의 노숙생활로 언어장애 및 자폐증세를 보이는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 구로종합사회복지관 권남정 지역복지팀장은 "가족단위 노숙자가 급증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할 때 자녀들을 위한 교육 및 양육비 등 지원의 특성화가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일거리 부족도 가족노숙자의 '부활'을 가로막는 장애요인이다. 서울시 집계에 따르면 가족노숙자중 남성가장의 경우 80% 이상이 일용직, 여성가장은 90%가 재활용품 수집, 쓰레기 분리수거 등의 일을 해왔지만 2개월여 전부터는 일거리가 끊어졌다.
한국도시연구소 하성규 소장은 "가족노숙자들의 방치는 비인간적인 삶을 대물림하라는 것과 같다"며 "숙식 및 의료서비스를 제공받을 수 있는 치료교육센터, 경제적 자활을 이끌어주는 자립준비센터에 이어 자녀 양육 지원기관 등 단계별 전문기관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진각기자
kimj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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