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군이야말로 참 미륵이십니다."6일 KBS 대하드라마 '태조 왕건'에서 고승 석총은 왕건(최수종)을 찾아 미륵관자(부처의 손가락 뼈)를 전하며 이렇게 말했다. 미륵이 뭔가.
내세에 성불하여 사바세계에 나타나 중생을 제도할 보살이다. 처음 후삼국이 열리면서 미륵은 궁예(김영철)였다.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하려고, 그 백성들과 고난을 같이하고, 백성에게 미륵의 정토를 열어주겠다고 일어선 궁예였다.
그 궁예가 점점 미륵의 모습을 잃어간다. "동방의 대제국을 건설하겠다"는 그의 욕망이 마음을 가려 버렸고, 간악한 책사 아지태(김인태)가 머리를 흐리게 했다.
자신의 출생 콤플렉스가 '관심법'이란 해괴한 무기로 나타나 사람들을 잡았다. 그의 눈과 귀는 더 이상 백성들에게 향하지 않았다.
민심은 궁궐에서부터 변하기 시작했다. 나라를 이끌 참 지도자가 간절했다. 드라마는 왕건을 서서히 미래 고려의 왕으로 부각시키기 시작했다.
왕이란 어떤 인물이어야 하나. 7일 홀연히 나타난 열 네살의 신동 최응은 궁예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대중의 지지를 잃으면 나라를 잃는다는 것을 알아야 하옵니다.
더불어, 통치자는 먼저 덕을 쌓는데 힘써야 함을 근본으로 삼아야 하옵니다. 선함으로써 하늘의 도움을 받고, 포옹력을 가짐으로써 백성을 사랑해야 하고, 군자와 소인을 가려 등용할 줄 알아야 나라를 오래 보존할 수 있사옵니다."
그러나 궁예는 그 말을 실천하지 않았다. 결국 최응이 궁예에게 바치는 이 말은 왕건이 삼국을 통일하는 데 필요한 항목이 됐다. 드라마 '태조 왕건'은 지금까지 궁예와 견훤의 드라마였다.
궁예의 카리스마에 가려 왕건의 통치자적 자질이나 면모는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다. 시청자들은'저렇게 유약한 캐릭터로 어떻게 삼국을 통일할까'라는 의구심도 가졌다. 그러나 드라마를 보는 사이 시청자들은 알게 모르게 깨닫게 됐다.
왕건이 왜 나라를 얻을 수 있었는지를. 그가 왜 궁예 아래서 자신의 의지를 펼치지 보다는 그의 충직한 부하로 전쟁터를 누볐는지를.
■스스로를 자랑하지 않는다>
"대본을 쓰면서 가장 답답했던 점 중 하나가 왕건은 궁예처럼 누구 하나 시원하게 '죽이지'못한다는 점입니다."
작가 이환경씨는 아직까지도 왕건의 면모를 제대로 드러내지 못했다고 말한다. 그래서 '왕건이 너무 착하다 못해 바보같이 느껴진다'는 항간의 비판도 어느 정도 수긍한다.
'태조 왕건'은 해를 넘기는 마라톤이기 때문에 궁예의 강한 카리스마가 초반을 끌고 가야 하는 드라마 구성상 처음부터 왕건을 부각시킬 수는 없었다는 말이다.
그 때문에 실제 왕건의 성격을 왜곡시킨 것은 아니라고 했다. "궁예가 말 한마디로 고을을 장악하고 세금을 걷어들인다면 왕건은 사절을 보내 유화책을 취하고 혼인을 맺어 그들을 묶어둔다는 게 차이점입니다."
왕건은 '침묵'과 '기다림'을 알았다. 도선대사(이대로)가 '새로운 군주'임을 예언했지만 그는 때가 자기에게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은부가 궁예에게 직언을 한 석총을 죽일 때도, 그는 침묵만이 살 길임을 깨닫고 나주공략에 나선 견훤을 막겠다며 나주로 떠난다.
철원으로 금의환향한 후, 제국건설의 꿈에 들뜬 궁예를 지켜보며 말없이 자신의 책무만을 다한다.
호방하고 영웅적인 면모는 부족하다. '얄밉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연인이었던 연화를 궁예에게 양보한 것이 대표적 예이다. 진정한 영웅이었다면 사랑하는 여자를 지켜 주어야 했다.하지만 왕건은 연인이었다는 사실조차 숨긴 채 침묵했다.
왕건은 절대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는다. 그것은 극중에 그가 항상 부하들과 나란히 서 있는 것에서도 알수 있다. 각종 전투에서 승리한 후 공적 보고도 부하들에게 맡겼다. 공은 항상 궁예에게 돌렸다. 의심 많은 궁예의 화살을 피할 수 있던 방패였다.
■기다리며 준비한다
자수성가한 궁예와는 달리 왕건은 16세 때 도선대사로부터 수신제가를 사사한다.
드라마에서는 왕건이 무엇을 배웠는지 자세히 언급되지 않는다. 그저 무엇인가 '계시'를 받았다는 암시만 있을 뿐이다.
왕건은 인재들을 모은다. 장수는 물론 태평 같은 지략가, 심지어 견훤의 아버지인 아지개까지 아버지로 모신다. 그는 상대가 문무 어느 쪽이건 재능이 있다면 허리를 숙여 자신의 사람으로 만든다. 지방호족들과는 결혼으로 불가분의 관계를 맺는다.
이 같은 정략은 그가 왕이 된 후에도 계속돼 모두 29명의 아내가 대부분이 지방 호족을 다스리는 일종의 인질이 된 셈이다. 왕건은 극한 상황에서도 격정을 드러내지 않는 대신, 일단 행동을 결정하고 그 후에는 후회하지 않는 냉철함을 보인다.
■사람을 잘 써야 나라를 얻는다
사람을 믿고 부리는 일에서도 그는 궁예, 견훤과 비교된다. 견훤은 한번 잘못을 저지르면 그대로 수하를 처단하는 스타일이라면, 궁예는 두 번까지는 용서한다. 반면 왕건은 세 번 이상을 용서하는 유형이다. 단, 이용가치가 있는 사람에 한해서이다.
이렇게 용서를 받아 끝까지 왕건의 사람이 되는 수하가 유금필 능산(후의 신숭겸) 박술희이다.
13일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소년 모사 최응이야말로 왕건의 집권에 없어서는 안 될 전략가이다.
후백제 책사 최승우의 첩자가 은부에게 궁예 대신 왕건의 이름이 적힌 조작된 도선비기를 건네주자, 최응은 왕건에게 '역모를 꾀한 사실을 실토하라'는 전략을 세워줘 위기에서 벗어나게 한다.
궁예의 책사 종간이 '왕건이 왕위에 오른다'고 '고경참문'을 조작하자 허월 경보 등 당대 지식인들이 '궁예의 무사안일 기원'으로 거꾸로 해석해 왕건을 보호한다.
이들이 왕건의 사람이 된 것은 스스로를 낮추는 그의 용인술 덕분이다. 왕건은 일단 자신이 인정한 사람은 아낌없이 기용하며 그 의견을 폭넓게 수렴한다.
왕건은 자기 능력 이상으로 사람을 끌어모으는 데서는 삼국지의 유비, 무력과 회유를 적당히 섞으며 기다리다 때를 얻는 것에서는 일본 전국시대 최후의 승자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와 비견되기도 한다. '태조 왕건'의 저자 김갑동 대전대 인문학부 교수는 "왕건은 땅을 잃는 것보다 민심을 잃는 것을 더 두려워하는 인물"이라고 평했다. 그래서 왕건은 싸우지 않고 이긴다는 것이다.
930년 후백제를 격파하면서 그는 피를 흘리지 않고 많은 땅을 접수한다. 신라도 최후의 저항을 포기하고 순순히 투항한다. 견훤조차 아들의 역모에 분노해 왕건에게 온다.
미륵을 자처하며 반대자들을 가차없이 처단하는 궁예가 진골귀족 중심의 폐쇄적 고대사회에서 벗어나지 못한 반면, 왕건의 유연함은 중세적인 합리성을 대표한다.
■왜 지금 왕건인가
작가는 "왕건의 리더십은 조용하면서 무섭다"고 분석했다. 안영동 프로듀서 역시 "왕건의 승리는 결국 용인술의 승리"라고 한다.
왕건을 인의 장막으로 파멸을 자초한 궁예와 대조시킴으로써 민의를 수렴하는 정치가 결국 당장은 강해 보이는 파쇼적 통치를 이긴다는 교훈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시청자들은 드라마 '태조 왕건'을 보며 왕건에게서 올바른 지도자상을 발견하려 한다. 이 시대에도 유효하기 때문이다.
이제 겨우 중반을 넘어간 '태조 왕건'은 본래 오는 9월 종영 예정이지만 이환경 작가는 "연말까지 방송을 계속하고 싶을 정도"로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 많다고 했다. 천운과 투지가 어우러져 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왕건의 영웅담과 민족의 저력이 절실하게 요구되는 시대를 살고 있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이대현기자
leedh@hk.co.kr
양은경기자
key@hk.co.kr
■'태조 왕건'인기 비결
신라 군과 궁예의 군사들이 철원성에서 처절하게 전투를 벌일 때 갈매기 한 마리가 창공을 가른다.
한국 드라마사에 한 획을 그으며 지난해 4월 1일 방송에 들어간 '태조왕건' 의 시작이었다. 높이 비상하는 갈매기처럼 '태조 왕건' 은 첫 회부터 30%라는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며 지난 9개월동안 인기 고공비행을 하고 있다. 7일에는 40%의 시청률로 다른 모든 프로그램을 평정했다.
'태조 왕건' 은 방송에서 좀처럼 접하기 힘든 고려 시대를 다룬 드라마라는 점이 우선 시청자의 눈길을 끌었다.
통일 신라시대에서 후삼국으로 분열된 뒤, 왕건의 통일로 나가는 장대한 여정을 그린 '태조 왕건' 은 강한 남성상의 사극이면서도 '용의 눈물'의 1인극과 달리 각기 다른 성격의 세 영웅이 등장해 더욱 인기이다.
특히 카리스마가 강한 궁예 역을 맡은 김영철의 광기어린 연기와 지와 덕을 겸비한 왕건 역을 맡은 최수종의 부드러운 연기, 호방한 성격의 견훤 역의 서인석의 선굵은 연기가 조화를 이뤄 극적 완성도를 높이고 있다.
여기에 종간 아지태 등 책사들이 벌이는 파워게임은 권력과 야망, 처세의 방법을 묘사한다.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드라마적 허구를 적절하게 혼합해 세 영웅의 갈등과 사랑을 교묘하게 나타내 극적 재미를 배가시키는 작가 이환경씨의 노련함과 김종선 PD의 스케일이 큰 연출도 돋보인다. '
용의 눈물' 이 대선 정국의 상황과 엇비슷하게 전개돼 관심을 증폭시켰듯이 '태조 왕건' 역시 가신정치로 비난을 받고 있는 현 정치상황과 맞물려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시청률 상승에 한 몫하고 있다.
156회 예정으로 9월말 종영될 '태조 왕건' 은 7일 82회를 방송했다. 지금까지 궁예가 권력의 정점에 부상하는 과정이 전개됐다면, 앞으로는 궁예의 파멸과 왕건의 등극을 위한 정지 작업이 드라마의 주내용을 이룬다.
종간의 왕건에 대한 견제와 왕건의 반격, 그리고 장인과 부인, 아들까지 죽이는 궁예의 광폭한 행동이 이어진다.
3월 중순 타락한 궁예가 죽음을 맞게 된다. 드라마에선 궁예의 죽음은 거리에서 백성들에게 돌맞아 죽는다는 김부식의 '삼국사기' 의 내용과 달리 철원성에서 왕건에 최후까지 항쟁하다 죽는 것으로 그려진다.
안영동 책임프로듀서 "후반부에는 견훤의 모습이 비교적 많이 다뤄진다. 왕건이 전면에 나서지 않고 궁예와 견훤의 갈등 속에서 자연스럽게 화합과 덕의 정치를 구현하는 왕건상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드라마가 전개될 것" 이라고 설명했다.
배국남기자
knba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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