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의 막사발이 일본의 국보라는 사실은 이제 꽤 널리 알려져 있다. 일본 교토(京都)의 다이도쿠지(大德寺)가 소장하고 있는 막사발 국보는 임진왜란 때 잡혀간 우리 도공들의 작품이다.'국보가 된 조선 막사발'의 저자 신봉승씨에 따르면, 그들은 당시 야마구치(山口)현 하기(萩)지방에 끌려온 경남 사천 출신의 도공들이다
단순한 형태의 조선 막사발은 이가 빠지면 개 밥그릇으로도 쓰이던 흔하고 천한 것이었다. 그 막사발이 하기지방의 토양과 어우러지면서 일본을 뒤흔드는 명품이, 급기야는 국보가 된 것이다.
조선 막사발 국보에서 경탄하게 되는 것은 문화를 수용하는 일본인의 열린 자세이다. 유연하고도 적극적인 자세야말로 일본을 문화강국, 경제대국으로 키운 원동력이라는 점을 부인할 수가 없다.
지난 해 가을 이래 우리 미술사를 다시 쓰게 할 만한 두 점의 명화가 공개되었다. 난 그림의 제일인자 흥선 대원군의 '유란도첩(幽蘭圖帖)'과 '몽유도원도'의 작가 안견의 '고잔도장축도(古棧道長軸圖)'의 등장이 그것이다.
운 좋게도, 한국일보는 역사의 두꺼운 먼지를 털어내고 홀연히 모습을 드러낸 이 문화적 대사건을 모두 특종보도할 수 있었다.
두 점의 그림을 실물로 보던 순간의 벅찬 느낌을 글로 표현하기는 쉽지 않다. 어떤 높은 경지에 올라야 이렇게 탈속하고 천의무봉한 난 그림 108점이 나오는가.
수준이 한결 같이 고른 그림도 그림이려니와, 여백의 공간에 채워진 글씨는 얼마나 기품 있고 유려한가. 마음 깊은 곳에서 감탄이 끊이지 않고 솟아나왔다.
'인품이 높아야 필(筆)이 이를 취한다' '난을 사랑하는 것은 학문 외의 것이다' 등의 화제(畵題) 또한 옷깃을 여미게 했다.
안견의 당 현종 피난 그림은 500여년 동안 간직돼 온 탓에 표지는 마모되어 있었으나, 주름 잡힌 두루마리가 펼쳐지며 웅혼한 모습을 드러냈다. 험준한 산길을 따라 황망히 피난 가는 6개의 장면이 웅장한 구도 속에 정교하게 배치되어 있었다.
산세와 초목이 조화된 이 그림은 망국의 고난을 상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차라리 아름다워 보였다. 작가가 그림을 그리고, 그의 벗들이 빼어난 안목과 글씨로 제발(題跋)을 쓰는 아름답고 감동적인 장면도 연상되었다.
실로 이 두 그림은 우리 미술사를 다시 쓰게 할 국보급 명화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정작 흥분하고 관심을 가져야 할 문화재 관계자들은 이 엄청난 명화들 앞에서 입을 다물고 있다. 아예 관람하는 일조차 애써 피하는 무소신으로 일관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여러 미학적? 과학적 방법을 동원하여 작품을 감정한 후 소신 있게 진품인지 위작인지를 판정해야 한다.
두 그림이 진품이라는 확신은 먼저 그림들이 최상의 수준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림에서나 글씨, 제발의 내용, 낙관 등에서 모두 일류 화가나 문필가 아니면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최고수준을 드러내고 있다.
만에 하나, 이 그림이 위작이라면 최소한 4명 이상의 최고 수준을 지닌 위조꾼들이 참여해야 가짜 그림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런 탁월한 기량의 위조꾼들이라면, 굳이 위조를 할 필요가 없이 당당하게 작가로 나서 이름을 날리고 생계를 이을 수 있기 때문에, 위험하고 사회적으로 지탄 받는 위조를 할 리가 없다.
우리가 위작을 진품이라고 강변한다면, (존재할 리도 없다고 믿지만) 어디선가 위조꾼들이 비웃을 것이다.
그러나 대원군이나 안견의 귀중한 그림들을 정밀하게 감정도 하지 않은 채 위작으로 치부한다면, 우리의 나태로 인해 역사 앞에서 중죄를 짓는 셈이 될 것이다. 고미술 관계자들에게 이 명화들을 진지하고도 경건하게, 그리고 공개적으로 감정할 것을 권한다.
박래부 편집국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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