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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기행] (52) 허만하 시집 '비는 수직으로 서서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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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기행] (52) 허만하 시집 '비는 수직으로 서서 죽는다'

입력
2001.01.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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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 태백시 함백산에서 발원해 500km를 넘게 굽이쳐온 낙동강은 부산 다대포 앞바다에 이르러 몸을 푼다. 바다는 강이 죽는 장소다.낙동강은 그 죽음을 앞두고 모래를 쓸어 대저도, 을숙도 등 거대한 하중도(河中島)들을 부려놓는다. 낙동강이 남해와 만나는 그 모습을 시인 허만하(許萬夏ㆍ69)씨는 '적멸의 아름다움'이라고 표현했다.

'죽음을 매개로 한 조용한 轉身(전신)/ 강은 바다의 일부가 되어/ 비로소 자기를 완성한다'(<낙동강 하구에서> )

허씨의 시 중에서도 드물게 서정적이고, 따라서 독자들에게도 비교적 쉽게 와 닿는 '낙동강 하구에서'는 그가 자주 찾는 부산 강서구 봉림동 둔치도에서 씌어졌다.

둔치도는 낙동강 가운데 있는 자그마한 모래섬이다. 부산 지역의 기온이 근래 최저로 떨어졌다는 강바람 찬 겨울날, 허씨는 둔치도를 다시 찾았다.

"요즘은 물빛의 변화를 언어로 포착해내는 것이 나 자신의 훈련이자 과제라고 느낍니다.

부산에서 경북 울주를 거쳐 민통선까지 이르는 길, 동해물빛의 변화는 바다가 '생의 모태'라는 것을 다시 깨우쳐 주지요." 최근의 한 에세이에서 그는 물빛의 변화를 통해 '삶의 번득임으로서의 시'를 말한 적이 있다.

'파도가 희다는 것은 너무 일반적인 이야기다. 바닷물이 솟구쳐 올라 날카로운 각도로 접혔다 무너지기 직전 잠시 우울하고도 아름다운 쪽빛이 되는 것을 근래 알았다. 섭섭함 같은 애달픈 빛깔.'

허씨는 이렇게 일반이 생각하는 파도의 색깔을 달리 읽어내듯, 일반적으로 생각되는 '요즘 시인'의 모습과는 많이 다른 시인이다.

그는 50년이 넘는 시력에서 단 두 권의 시집을 냈다. 그가 첫 시집을 낸 후 꼭 30년 만인 1999년 발표한 두번째 시집 '비는 수직으로 서서 죽는다'는 20세기 말 우리 문단의 일대 사건으로 기록됐다.

지방에서, 병리학을 강의하는 의사 대학교수라는 직업을 가지고, 시인으로서는 묻혀지고 잊혀졌던 그는 이 시집으로 문단에서 "어설픈 사고와 감상과 대중적 푸닥거리와 쉬운 위안이 유행하는 시대에.가장 가차없는 시인"으로, "허만하는 마치 스톤헨지의 유적처럼 발굴됐다.

망각의 석관을 열고 저벅저벅 걸어 나와 부동의 자세로 우뚝 섰다"고 평가됐다. 왜 그간 시집을 내지 않았는가? 내주겠다는 사람도 없었다라는 것이 그의 간명한 대답이다.

6ㆍ25이후 박목월, 유치환에게서 문학의 세례를 받고, 이제는 문학사 속으로 편입된 동갑내기 박재삼과 문학청년 시절을 같이 어울렸던 의학도가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우리 문학 속으로 다시 나타난 것이다. 놀라운 轉身(전신)이다.

'낙동강 하구에서'의 구절 그대로 '미지에 대한 두려움과/ 커다란 긍정 사이에서/ 서걱이는 갈숲'이 무성한 둔치도에서 허씨는 메를로 퐁티의 "실존은 수직이다"는 실존주의의 선언적 구절을 들려준다. '수직'은 그의 시세계를 한 마디로 나타내는 단어이다.

'비는 수직으로 서서 죽는다'는 한 구절을 얻기 위해 그는 오래 기다렸다고 했다.

평면에 굴복당하지 않고, 눈부신 벼랑처럼 외롭게 직립하는, 수직으로 혼자 서는 것이 시라는 것이다. '언어 그 자체로서의 자립성'을 말하는 그의 시는 바로 그 때문에 값싼 시들과 다르다.

시집 '비는 수직으로 서서 죽는다'에 실린 그의 시들은 마른 멸치의 뼈에 새겨진 바다의 냄새를 아득한 고생대로부터 기억하는(<마른 멸치를 위한 에르키스> ) 원시적 상상력과, 6ㆍ25의 상흔에서 '폭포처럼 수직으로 선 알몸의 시'( <신현의 쑥> ) 를 꿈꾸는 역사적 상상력, 그리고 '꿈의 시체 위에 다시 쓰러지는/ 투명한 꿈의 투신'( <드라이 마티니> )을 생각하는 예술가적 상상력으로 그득하다.

한 후배 시인의 "허선생님의 두번째 시집은 10년 전에 발표됐다면 전혀 주목받지 못했을 것"이라는 말은 거꾸로 그의 시가 어떠한 문단적 유행이나 흐름에도 구애받지 않는 존재론의 시라는 점을 반증한다.

6ㆍ25 이후 실존주의 철학이 이 땅의 지성을 휩쓸었듯이, 전쟁만큼이나 곤고한 삶이 이어지고 있는 세기말 세기초에 허씨의 시는 다시 철학이라는 굳건한 사고를 바탕으로 깔고 나타났기에 진정으로 받아들여진다는 얘기일 수 있다. "우리 시는 엷은 전통적 서정이 주조였다.

그것을 뒤따라가기는 싫었다. 서정에 몸을 붙인 채라도, 적어도 50년은 인간 정신을 앞서나갈 수 있는 세계어로 말해야 한다. 물신주의 이데올로기에 지배당해 시적인 마음을 잃고, 언어의 자율성을 버려서는 안된다.

시의 언어를 공리주의적 이념에서 탈환해야 한다"고 허씨는 강조한다. 그런 의미에서 자신은 이상주의자라고 덧붙인다. 그의 시가 독자는 물론 평자로부터도 난해하다는 평을 듣는 이유이다.

낙동강 유역의 생태계를 바꿔버린 거대한 하구둑 아랫길을 따라 다대포 쪽으로 향하는 강심에는 그래도 먹이를 찾아 날아와 유유히 비행하고 있는 수천 마리 고니떼들이 목격된다.

이 길의 끝, 언덕에 서면 다대포 앞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오른쪽으로 낙동강이, 왼쪽으로는 태평양에 잇닿은 남해가 거대한 규모의 삼각주들을 사이에 둔 채 만난다.

허씨는 강의 흐름이 여기서 잠시 머뭇거리지만 '두려워 말라, 흐름이여/ 너는 어머니 품에 돌아가리니'라며 대자연의 순환을 일러준다.

그의 시선은 이렇게 자연을 보면서도 언제나 내면으로 향해 있다. '낙타는 십리 밖에서도/ 물냄새를 맡는다/ 맑은 영혼은 기어서라도 길 끝에 이르고/ 그 길 끝에서/ 다시 스스로의 길을 만든다/ 지도의 한 부분으로 사라진다'(

).

사막에서 죽어갔던 프랑스 시인 랭보를 노래한 이 시에서처럼, 허씨에게는 바다도 사막도, 그 너머의 어떤 것을 찾는 '견자(見者)-시인'의 길일 뿐이다.

'화약처럼 불타는 언어/나는 불타는 언어로 내 두 눈을 태웠다'(<사하라에서 띄우는 최후의 엽서> ) 이런 언어를 추구할 때 허씨는 여전히 젊은 시인이다.

그는 10년 전 불의의 뇌출혈로 의학용어로는 강직성 좌반신 마비로 불리는 중풍을 당했다. 젊은이 저리 가랄 정도로 거침없이 폭포처럼 생각을 쏟아내는 자신과는 달리, 동행 내내 거의 한마디 없이 과묵한 부인의 부축이 없으면 거동도 불편하다.

하지만 이제 자신의 시를 불러주는 이가 있다면 그는 어느 때보다 열심히 쓸 작정이라고 말했다.

"이곳처럼 저 부드러운 해안선을 아름답게 바라볼 수 있는 자리, 삶의 그런 자리를 찾는 것이 시가 아닌가요"라고 그는 말했다.

■연 보

▦ 1932년 대구 출생

▦ 1957년 경북대 의대 졸업, '문학예술'지 추천으로 등단

▦ 1962년~ '현대시' 동인

▦ 1997년 부산 고신대 의대 교수 정년퇴임

▦ 시집 '해조(海藻)'(1969) '비는 수직으로 서서 죽는다'(1999), 일본어시집 '동점역(銅店驛)'(1980), 산문집 '부드러운 시론'(1992) '낙타는 십리 밖 물냄새를 맡는다'(2000)

▦ 박용래문학상(1999) 한국시인협회상(2000) 수상

■낙동강 하구에서

바다에 이르러

강은 이름을 잃어버린다

강과 바다 사이에서

흐름은 잠시 머뭇거린다.

그때 강은 슬프게도 아름다운

연한 초록빛 물이 된다.

물결 틈으로

잠시 모습을 비쳤다 사라지는

섭섭함 같은 빛깔.

적멸의 아름다움.

미지에 대한 두려움과

커다란 긍정 사이에서

서걱이는 갈숲에 떨어지는

가을 햇살처럼

강의 최후는

부드럽고 해맑고 침착하다.

두려워 말라, 흐름이여

너는 어머니 품에 돌아가리니

일곱 가지 슬픔의 어머니.

죽음을 매개로 한 조용한 轉身.

강은 바다의 일부가 되어

비로소 자기를 완성한다.

■마른 멸치를 위한 에스키스

마른 멸치 내부에는 헐리고 있는 초가집 내부에서 보는

것 비슷한 뼈대가 있지만 그보다도 훨씬 더 정교한 흔적이

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인체 해부도보다 섬세하 구도로

멸치는 신체 내부의 힘의 배분과 균형 그리고 정확한 치수

를 선박 설계도처럼 관리한 증거를 화석처럼 가지고 있다.

멸치의 빈 내강은 물을 치는 자세 부드러운 몸짓 그리고

은백색 선으로 반짝이는 바다 냄새를 슬픔처럼 담고 있지

만 사람들은 그것을 보지 못한다. 그것은 난류 수역을 회유

하던 멸치떼가 물장구를 치면서 살아 있는 물결처럼 산란

을 위하여 밤의 내만으로 헤엄쳐 들어오는 달빛 같은 신비

를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

바다에 대한 그리움으로 응고한 육질을 최후까지 떠받치

고 있는 미세한 갈비뼈는 애처롭게 아름답다. 꿈처럼 쓸쓸

한 좌절의 역사를 내장하고 있는 마른 멸치.

마른 멸치의 어린 뼈대를 보면 가을바다 물빛처럼 슬퍼

진다. 내가 응시하고 있었던 것은 마른 멸치가 아니라 순결

한 감성의 소유자가 몰살되어야 하는 바로 그 이유였던

것이 틀림없다.

하종오기자

joha@hk.co.kr

이성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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