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 경제권이 붕괴된 1980년대 말부터 1994년 사망할 때까지 김일성(金日成) 주석은 하루 일정을 평양시내에 전기를 공급해주는 평양화력발전소(석탄발전ㆍ40만㎾) 굴뚝을 확인하는 것으로 시작했다.굴뚝에 연기가 나지 않으면 정무원 총리에게 발전소 가동을 직접 지시했고, 총리는 평양을 경유하는 모든 석탄 수송열차를 평양화력으로 향하도록 조치하는 수선을 피웠다.
이런 일화에서 짐작할 수 있듯 80년대 중반부터 악화한 북한의 전기 사정은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하다. 1995년 말까지 평양에 살았는데, 평양에서도 시간제 전기 공급이 이뤄졌다.
다만 노동당, 만수대의사당 등 주요시설이 밀집된 중구역과 외국대사관이 밀집한 대동강구역 문수거리는 예외다. 이들 지역도 1995년께에는 시간제로 전기를 공급했다.
평양 주민들은 80년대 중반까지 석유 곤로로 밥을 지었으나 연료 공급이 여의치 않자 이후 전기 곤로를 이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전기 부족이 지속되자 평양시 당국은 취사 시간인 아침 저녁에 전기를 공급해주지 않았다. 전기곤로 사용으로 전기 사용량이 급증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주민들은 자동차 충전기를 이용하거나, 점심시간 등을 이용, 인근 산과 들로 나무 등 땔감을 구하러 다녀야 했다.
평양시민 등 모든 북한 주민들에게는 전기 사용량이 할당된다. 하루에 백열등 2~3개 정도를 5~6시간 사용할 수 있는 양이다.
전기 계량기가 가정마다 설치된 평양의 경우 이 할당량을 초과할 수 없으며, 만약 전기곤로 사용 등으로 초과 사용이 적발될 경우 평양에서 추방되었다. 집집마다 계량기가 없는 농촌의 경우 변전소측에서 자의적으로 전기 사용량을 계산해 전기공급을 끊는다.
1990년대 이후 농촌 전기 사정은 말이 아니다. 전기가 부족함에 따라 멀쩡한 농촌 수도 시설(1970년대 건설)은 가동되지 못했고, 농민들은 우물을 이용했다. 하루종일 백열등을 켤 수 없는 가정이 농촌에는 수두룩하다.
1996년부터 살았던 함북 김책시의 경우도 농촌과 사정이 별반 다르지 않다. 1980년대까지 김책시에는 성진제강소가 있어 비교적 전기사정이 좋았다고 들었는데 내가 살던 당시 김책시 주민들은 초저녁 1~2시간정도만 전기를 이용할 수 있었다.
한편 북한 당국은 전기사정의 악화에도 불구, 군수공장에는 전기를 우선 공급해주는 시책을 펴고 있다. 양강도, 자강도의 군수공장에는 전기 공급이 끊이지 않도록 배려하고 있다. 김책시의 경우 어뢰정 부속작업반에는 항시 전기공급이 끊이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한태철씨는 누구...
한태철(49)씨는 김책공대를 졸업한 후 1979~1995년 과학원 수리공학연구소 수차연구실 연구사로 근무한 엔지니어 출신 탈북자다.
과학원 근무 당시 한씨는 수풍댐 등 5개 북한수력발전소 터빈 보수 및 성능개선 업무를 맡았다. 하지만 1995년 말 가정혁명화 대상자로 분류돼 김책시로 좌천됐다. 1997년 부인 딸과 함께 탈북, 지난해부터 남한에서 살고 있다.
한태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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