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그네는 꽃 지는 밤에 다니는 법입니다."이 말에 소설가 윤대녕(39ㆍ사진)씨의 글의 비밀이 숨어있다. 그는 늘 배낭을 꾸리는 작가다. 길 위에서 그는 쓰고 곧 또 다른 길을 떠난다.
그가 처음으로 묶어낸 산문집 '그녀에게 얘기해주고 싶은 것들'(문학동네 발행)은 이 길의 기록이다. 나그네의 유랑, 거기에서 찾은 꽃 - 아름다움, 그리고 밤 - 삶의 시원에 대한 탐색이 곧 윤씨의 소설과 글의 주제이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아름다운 길이라고 윤씨가 생각한다는 속초-경주 간의 7번 국도, '화적떼처럼' 꽃 무리를 이끌고 봄이 북상하는 경남 하동 쌍계사의 벚꽃길, 전북 고창의 선운사에서 출발해 곰소와 내소사를 거쳐 서해의 눈부신 낙조가 있는 채석강으로 이어지는 30번 국도가 모두 그의 길이다.
한국을 떠나 필리핀 인도네시아 중국 태국 일본에서 쿠바까지의 이국 여행도 그의 길이다. 윤씨는 그간 떠돈 이 길들에서 낚아올린 산문을 자신이 직접 찍은 사진과 곁들여 이번 책을 묶었다.
산문집이라 하지만 '그녀에게 얘기해주고 싶은 것들'은 하나의 일관된 틀을 가진 윤씨의 또 한 편의 기행소설이라 해도 좋을 것 같다.
"기존의 에세이나 산문집과는 좀 다른 형태의 글을 쓰고 싶어 우선 편지투의 문장을 택하기로 했다"고 그가 밝혔듯 이번 책은 편지라는 형식을 통해 전체 글의 흐름이 하나로 이어지는 스토리다.
내용은 그가 인도네시아 발리의 여행길에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우연히 만난 한 스튜어디스에게 보내는 편지이다. 이 여인을 윤씨는 그 전 서울 광화문의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우연히 만난 적이 있다.
낯선 여행지를 떠돌다 자신의 마음을 흔드는 풍경과 만날 때, 맛난 음식을 먹고 비지스의 'Holiday' 같은 영혼을 울리는 음악을 들을 때, 돌아와 여행지의 기억을 들추다 알지못할 막막한 그리움과 조우할 때마다 그는 이 여인에게 편지를 쓴다.
이 형식을 통해 윤씨는 흔히 '존재의 시원을 찾아가는 탐색'으로 평가되는 자신의 소소설 쓰기에 얽힌 비밀도 털어놓는다. 그 중의 하나가 사슴 이야기다.
아홉살 때 할머니의 손에 이끌려 어느 집 울타리 안에 갇힌 뿔 달린 어여쁜 짐승을 그는 본다. 그는 "몇백 년 벼려온 칼에 온몸이 두쪽으로 깨끗하게 갈라지던 느낌"으로 "햇빛 속으로 맑게 퍼져나가던 내 피의 환영"을 보았다며 사슴의 모습을 처음 보던 그 순간에 자신의 유연의 한때가 영원히 그 순간에 고정돼 있다고 고백한다.
또 어릴 때 조부에게서 듣던 이야기로 막연히 동경해 오던 중국의 이미지가 실크로드의 사막에서 비로소 실체화했고, 그 매개에 란저우(蘭州)에서 만난 한 중국 여인이 있었다며 윤씨는 그것을 '인연'의 실타래라 해석하기도 한다.
어느 글이나 이러한 윤씨 특유의 탐미, 청춘의 희망과 기쁨을 지나야 하는 인생길의 사무친 정조가 반짝반짝 빛을 발한다. 그 빛이 윤대녕 글의 매력이다. 이런 것이다.
"다시금 새벽, 복분자 술을 마시며 혼자 빗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이제 당신은 당신의 자리로 바삐 돌아가야겠군요.
미련이 남은 내가 가닿기 전에 부디 꿈에서 깨어나 속히 떠나시기 바랍니다. 아, 오늘도 고단하게 이어지는 이 머나먼 생의 열대.
하종오 기자
joh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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