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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속으로] 저우언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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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속으로] 저우언라이

입력
2001.01.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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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1월8일 중국의 총리 저우언라이(周恩來)가 78세로 작고했다. 장쑤성(江蘇省)의 넉넉한 집안에서 태어나 도쿄와 파리에서 유학까지 한 저우언라이는 자신의 계급을 훌쩍 뛰어넘어서 일생을 중국 혁명에 바쳤다.대학 재학 중 5ㆍ4 운동 참여로 시동을 건 그의 혁명의 역정은 중국공산당 파리 지부(支部) 창설, 상하이(上海) 봉기 지도, 난창(南昌)폭동 지도, 광저우(廣州) 코뮌 조직, 대장정(大長征) 참가, 항일연합전선 결성 등으로 이어졌고, 49년 공산 정권 수립 뒤 작고할 때까지 그는 총리로서 동분서주하며 중국 혁명의 완수와 현대 중국의 건설에 온힘을 쏟았다.

마르크스 옆에서 엥겔스가 그랬듯, 저우언라이는 마오쩌둥의 옆에서 그의 그림자로서, 2인자로서 살았다. 그러나 닉슨의 적절한 평가대로, "마오쩌둥이 없었다면 중국 혁명의 불길은 타오르지 않았겠지만 저우언라이가 없었다면 그 불길은 이내 사그라들었을 것이다."

25년 전 오늘 저우언라이의 죽음은 톈안먼사건(天安門事件)이라고 불리는 민중 불복종 운동을 불러일으켰다. 이 사건은 우리가 지금 흔히 톈안먼 사건이라고 부르는, 89년 6월4일의 민주화 시위 진압 사건과 구별하기 위해서 제1차 톈안먼 사건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저우언라이가 사망하자 중국에서는 그를 주자파(走資派: 자본주의의 길로 나아갔다고 비판받은 실권파)로 몰아 격하하려는 극좌적 조류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문화 혁명 주도파들의 이런 움직임에 맞서 베이징(北京) 시민들이 76년 4월4일 청명절(靑明節)과 그 이튿날 톈안먼 광장에 모여 벌인 저우언라이 추모 시위는 당국에 의해 무자비하게 진압됐지만, 문화혁명이 끝난 뒤인 78년 11월 그것이 혁명적 행동이었다는 평가를 받았고 그 뒤 4ㆍ5 운동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고종석 편집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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