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에서 근대의학을 공부한 첫 한국 여의사는 '에스터 박'이다. 그리고 올해는 에스터 박이 귀국한 지 꼭 100년 되는 해다. 무슨 기념행사라도 열릴 법 하지만 아무 일 없이 한 해가 가는 것같아 자못 아쉽다.에스터 박은 원래 이름이 김점동(金點童ㆍ1876~1910). 어쩌다가 그녀의 이름이 박씨로 남게 된 것일까? 대답은 뜻밖에도 간단하다.
남편이 박씨였던 까닭이다. 김점동의 남편 박유산은 선교사 제임스 홀을 돕던 조선의 청년이었다. 선교사의 부인 로제타 홀 역시 선교 의사였는데, 이화학당을 다니던 김점동은 그녀를 도와주던 여학생이었다.
이 선교사 부부의 중매로 이들이 결혼한 것은 1893년. 한국 역사상 최초로 교회에서 서양식 결혼식이 치러졌다.
2년 뒤 이들 부부는 미국 유학길에 오른다. 미국 가는 여비는 로제타가 겨우 마련해 주었지만 미국생활은 그들이 꾸려 갈 수 밖에 없었으니 고생은 말할 수 없을 지경이었을 게다.
그런데 당시 한국 남성으로서는 놀랍게도 박유산은 아내가 1년 동안 간호학교를 다니고 볼티모어 여자의과대학을 다니는 4년 동안 막노동으로 김점동을 도왔다.
그러다가 1899년 박유산은 과로에 폐결핵으로 볼티모어에서 세상을 떠났고 아내 김점동은 '에스터 박'으로 1900년 6월 대학을 졸업하고 의사가 되어 귀국했다.
귀국 후 10개월 동안 에스터는 3,000명의 여성 환자를 돌볼 정도로 열심히 일했다.
남녀유별이 심한 당시에는 여성 환자를 위해 여자 의사가 절대로 필요했다. 로제타와 두어 명의 선교 의사밖에 없던 때 에스터의 할 일은 그야말로 산처럼 많았다.
그런 과로가 꼭 10년 계속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1910년 나라가 망할 때에 맞춘 듯 남편과 마찬가지로 결핵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에스터 박 김점동의 나이는 35세.
죽기에는 너무나 젊은 첫 여자 의사였다.
그녀는 미국에서 라틴어, 수학, 물리 등을 배우고 대학에 들어가 의학을 배운 최초의 한국 여성이다. 남자로는 서재필이 첫 미국 의대 졸업(1892)이었고 에스터가 두 번째였다.
서재필은 한국 역사에 의학 또는 과학으로 기여한 것은 거의 없지만 김점동은 근대 의학 도입에 크게 기여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녀를 그냥 그늘에 던져두는 우리가 잘못이다.
박성래 (한국외국어대 교수)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