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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천의 자연과 세상] '용꿈 깨고 '뱀 지혜' 배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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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천의 자연과 세상] '용꿈 깨고 '뱀 지혜' 배우자

입력
2001.01.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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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의 해가 밝았다. 우려와 기대가 뒤섞이기는 어느 해나 마찬가지이지만 금년엔 우려 쪽이 한결 무거운 듯 싶어 우울하다. 하지만 금년이 뱀의 해라는 점에서 적지 않은 위안을 얻는다.새 시대를 연답시고 들떠 날뛰던 작년이 하필이면 용의 해였는지 야속하기까지 하다. 하루아침에 용으로 승천이라도 할 듯 허튼 정책을 남발한 정부의 장단에 '대박'이다 '한탕주의'다 하며 너도나도 용꿈 꾸기에 바빴던 한 해를 보내고 지극히 현실적이고 현명한 뱀을 맞는다.

십이지(十二支)의 동물들 중 뱀 같은 영물은 또 없으리라. 에덴 동산에서 이브를 꼬여 선악과를 먹게 한 죄로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비록 '배로 다니'게 되었을 망정 웬만한 동물 뺨칠만큼 헤엄도 잘 치고 나무도 잘 탄다.

둥글고 긴 몸통 때문에 과학자 아닌 과학자 프로이트로부터 성욕의 표상이라는 얼토당토않은 명성을 얻었고 이렇다 할 과학적 근거도 없이 정력에 좋다는 옛 문헌 덕택에 우리 산야에선 끊임없이 수난을 겪고 있지만 진화의 역사에서 뱀만큼 성공한 동물도 드물다.

뱀은 전 세계적으로 2,700여종이 알려져 있으며 극지방을 제외한 거의 모든 생태계에 서식한다. 열대우림에 가장 많이 분포하나 물 한 방울 없는 사막에서 바다 속까지 그들이 살지 않는 곳을 찾기 어렵다.

예전에 생물학을 배운 분들이라면 모두 온혈동물과 냉혈동물의 구분을 기억할 것이다. 하지만 냉혈동물이라고 해서 그들의 피가 항상 차디찬 것은 아니다.

다만 피를 데우는 방식이 다를 뿐이다. 인간을 비롯한 젖먹이동물 들이나 새들은 늘 일정한 체온을 유지하기 위해 몸 속 난로에 항상 불을 지피고 있는데 반해 뱀들은 주변 온도에 체온을 어느 정도 내맡기고 산다.

그러다 체온이 너무 내려간다 싶으면 따뜻한 곳으로 옮겨 앉을 뿐이다. 냉혈동물이 아니라 변온동물이라 불러야 옳다.

느림과 절제의 미학

스스로 세워놓은 높은 생활수준에 맞추려 밤낮 없이 일해 땔감을 버는 동물이 우리라면 없으면 없는 대로 조금 덜 먹고 덜 쓰는 동물이 바로 뱀이다.

그저 일주일에 한번 또는 한 달에 한번만 식사를 하면 그만이다. 객쩍게 돌아다닐 필요도 없다. 큰 뱀일수록 듬직한 먹이 한 마리를 삼키곤 길면 몇 주씩 지긋이 한 자리에 머문다. 천민과 선비가 사는 법은 이처럼 다르다. 뱀은 느림과 절제의 미학을 일찍부터 깨달은 동물이다.

얼마 전 평화문화지수라는 것이 제정되었다. 경제대국들의 지수는 형편없이 낮은 반면 덴마크와 네덜란드 같이 국토도 작고 인구도 적은 나라들의 지수가 훨씬 높게 나왔다.

"우리 아빠가 그러시는데 우리 나라가 세상의 중심이 된데요"라던 어느 대기업의 이미지 광고를 기억한다.

우리는 너무 자주 어쭙잖게 세계 제일을 부르짖는다. 이젠 용꿈에서 깨어나 뱀의 냉철함을 배울 때다. 자기 기만도 적당히 해야 약이 되는 법이다.

강대국꿈 버리고 삶의 질 높여야

맞아죽을 얘기인지 모르지만 우리 나라는 죽었다 깨어나도 세계 초강대국이 될 수 없다. 물론 전국민이 악착같이 덤벼들면 강대국 대열 저 뒷자리쯤에는 낄 수 있을지 모른다.

국민 대부분이 평생 10년 이상 병치레를 하면서 말이다. 우리가 뭘 그렇게 가진 게 많다고 미국이나 중국과 어깨를 겨루려 하는가. 덴마크나 네덜란드처럼 작지만 삶의 질이 높은 그런 나라가 되려고 노력하는 것이 보다 현실적이고 바람직한 일이 아닐까.

국제정치에는 문외한이지만 나는 종종 우리나라는 남북통일과 함께 중립국가가 되면 어떨까 하는 위험한 생각을 해본다. 또 그걸 전제로 북측과 협상을 하면 의외로 많은 문제들이 쉽게 풀리지 않을까 하는 짧은 생각도 해본다.

"곧기는 뱀의 창자다"라는 우리 옛 속담이 있다. 나라 사정이 여러 모로 어려운 즈음에 한번쯤 되씹어 볼만한 말이다.

겉으로 보기엔 꾸불텅한 뱀이지만 곧은 듯 보이는 몸 속에 실제로는 꼬불꼬불 뒤엉킨 창자를 숨기고 사는 우리보다 훨씬 더 곧은 창자를 가지고 있다. 구조조정이 피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은 국민도 다 알지만 겉 모습만 번드레하게 치장해서는 불신만 는다.

총체적인 위기를 맞고 있는 사회윤리도 결국 불신에서 싹이 튼 것이다. 겉보다는 속 창자가 곧아지는 뱀의 해가 되길 진심으로 기원한다.

개인적으로 나는 뱀이 내 귀나 핥아주길 기원하며 느긋하게 새해를 맞는다. 인류 최초의 예언자 멜람포스가 어느 날 나무 밑에서 낮잠을 자다 뱀이 귀를 핥자 홀연 온갖 동물들이 저희끼리 나누는 말들을 알아듣게 되었다 한다. 동물행동학자가 그 이상 더 무엇을 바라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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