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첫 '정숭호가 만난 사람'은 두 봉(杜 峰) 주교입니다. 프랑스 에서 태어난 그는 올해 일흔 하나로 신부로 서품 된 이듬해인 1954년에 우리나라에 와 대전과 안동에서 사제생활을 하다 90년에 물러나 지금은 행주대교가 내려다보이는 경기 고양시의 한 농촌마을 언덕배기에 마련한 공소(公所)에서 거처하고 있습니다.그를 새해 첫 손님으로 소개해야 겠다는 생각이 든 건 그가 '아름다운 사람'과 '아름다운 삶'을 찾아 알리는데 남은 생을 바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서 였습니다.
천주교 사제인 그를 포함해 종교인들이 생각하는 '아름다운 사람'과 '아름다운 삶'이 어떠하리라는 게 짐작 안 되는 바 아니었고, 새해 덕담으로도 진부한 소재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래도 그를 만나고 싶었습니다.
아마 지난해를 보내면서 '아름다운 이야기'를 그리워했던 사람은 저만이 아닐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을 겁니다.
그를 만난 곳은 유리창이 큰 방이었습니다. 귀가 얼 정도로 차가운 날씨였지만 한 세 평이나 될까, 그의 방은 서남향으로 난 창을 통해 밀려드는 따뜻한 햇볕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농촌마을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수수한 단층 기와집이었지만 창이 크니까 밝고 따뜻한 햇볕이 가득 들어오는 것이었습니다.
창 밖으로는 어수선하면서도 정감이 가는 겨울 논밭이 멀리 펼쳐져 있었습니다. 햇살 속의 바깥 풍경은 평화로웠습니다. 이따금 지나가는 사람들의 움직임도 느릿느릿, 추위 속의 조바심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함께 간 사진기자의 카메라를 보자 "아이쿠, 사진도 찍어요? 윗도리를 입어야겠네요"라며 웃음을 터뜨리며 기자를 반갑게 맞았습니다.
그는 "어떤 이가 아름다운 사람"이냐는 저의 첫 질문에 "세상 만사를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는 "오막살이에 살고있더라도 자기 집으로 생각하고, 고맙게 생각하는 사람이면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객관적으로야 어떻든 주관적으로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세상살이도 달라지는 것 아니에요?"라고 되묻기도 했습니다.
"삶을 보는 자세에 따라서 세상살이도 달라집니다"
맞는 말이지요. 그러나 뭔가 아쉬웠습니다. '항상 긍정적으로 생각하라'는 말은 '현재에 만족하라는 말'로 들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저는 '모든 사람이 현재에만 만족하는 삶을 산다면 사회나 개인의 발전이 있을 수 있을까요?'라고 묻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더 나은 것을 위한 '목표', 다른 말로는 '동기'없는 삶에 발전이 있을 수 있느냐고 물어본 것이지요.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렇다면 아주 훌륭한 집에 사는 사람, 아주 좋은 환경에서 사는 사람은 모두 아름다운 사람, 행복한 사람이라고 보시오? 평소에 부정적으로 살고 있는 사람은 환경이 아무리 좋아도 만족할 수 없습니다.
제 말은 발전하지 말자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긍정적으로 살아야 발전이 있는 것입니다"고 말했습니다
다음 저의 질문은 "그런 걸 알고도 못하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그런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요"라는 것이었습니다. 우선 저부터 그런 사람일 테니까요.
그의 답을 옮기기 전에 저의 안타까움을 하나 이야기해야겠습니다. 50년 가까이 우리나라에서 살았으니 그는 우리 말을 아주 잘합니다.
말을 잘 할뿐 아니라 표정과 손짓 몸짓이 풍부해 즐겁게 대화를 즐겁게 이끌어가는 사람입니다. 말끝마다 터져 나오는 웃음소리도 아주 밝습니다.
제가 모자라는 질문을 해서 그렇지 분위기는 시종 맑고 따뜻했습니다. 그의 표정과 손짓 몸짓을 제대로 옮기지 못하는 게 안타깝습니다.
"아름다운 걸 아름답게 보기 위해서는 눈뜰 줄을 알아야 합니다. 한 화가가 있었는데 가장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고 싶더랍니다. 그래서 아름다운 것을 찾아 길을 떠났습니다.
화가는 길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가장 아름다운 게 뭐냐고 물었습니다. 한 종교인에게 물었더니 '믿음'이 가장 아름답다고 했습니다.
한 여인은 '사랑'이 가장 아름답다고 했습니다. 군인에게 물었더니 '평화'가 가장 아름답다고 했습니다. 화가는 모든 게 맞다고 생각했습니다.
'믿음직스럽고 사랑스럽고 평화로운 것이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고 생각한 화가는 그런 대상을 찾아 나섰는데 좀처럼 눈에 보이지 않더랍니다. 그래서 화가는 그림 하나도 못 그리고 집에 돌아왔다고 합니다.
배 고프고, 돈도 떨어져 어깨가 늘어진 채 집에 돌아온 화가는 집에서 자기가 찾던 그림의 대상을 찾았습니다. 힘없이 돌아온 그에게 '아빠가 돌아왔다'며 발을 구르며 매달리는 아이들과 반갑게 맞이해준 아내였습니다.
그는 그 자리에서 가족의 그림을 그리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림'이라고 제목을 붙였답니다. 아름다운 건, 다른 데 있는 게 아니고 가까운 곳, 눈뜨기만 하면 되는 곳에 있었다는 겁니다. 하하하!"
다시 한 번, '믿음' '사랑' '평화', 그리고 돌아온 아빠와 남편에게 매달리는 가족들의 이야기를 할 때 그의 표정과 말소리를 그대로 옮기지 못하는 아쉬움이라니! 하지만 그런 내색을 감추고 또 물었습니다. "주교님은 신앙인이니까 그렇게 말씀하는 게 당연하겠지만 신자가 아닌 사람은 그런 생각을 하기 어렵지 않을까요"라고 말입니다.
"아름다운 건 가가운 곳에... 여러분 ,눈을 뜨십시요"
그는 "물론 신앙을 안 가진 사람은 나만큼 세상을 긍정적으로 보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하지만 안 믿는 사람이라도 보는 눈에 따라서는 세상이 달라집니다"라고 말하더니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작은 잡지 두 권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잡지는 신앙생활 하는 사람이 만드는 게 아닙니다.
화장품장사 하는 사람들이 만드는 건데 겉으로 아름다운 것보다는 내적인 아름다움이 더 많다는 걸 찾아내 이 잡지를 내고 있습니다. 세상을 따뜻하게 보면서 행복하고 아름답게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가득한데 신자가 아닌 사람이 더 많습니다"라면서 말입니다.
그러더니 그는 자꾸 따지듯 물어보는 저에게 "오랜만에 자극을 주는 질문을 받아서 재미있습니다. 계속 이렇게 대화 합시다"고 했습니다. 그의 주문을 받아서가 아니라 한 가지 더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었습니다. 아니 이미 묻고 들은 것인데 부족해서 한 번 더 물었습니다.
긍정적인 삶, 욕심을 내지 않는 삶이 바람직하다고는 하지만 탐욕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결국에는 그들만 손해 아니냐, 또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걸 알고는 그렇게 살게 된 것 아니냐고 물은 겁니다.
그는 프랑스 이야기를 했습니다. "내 고향 프랑스는 주당 노동시간이 35시간밖에 안됩니다.
그리고 1년에 유급휴가가 5주일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전보다 살기 힘들어졌다고 아우성입니다. 고향에 있는 동생이 편지를 보내왔는데 '조카들이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
예전보다 훨씬 살기 좋아졌는데도 일이 많아 힘들어죽겠다, 살기가 짜증이 난다는 말을 입에 붙이고 있다,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라고 썼습니다.
분명 전보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워 졌는데도 사람들은 만족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계속 물질적 풍요만을 추구해야 할까요? 남보다 더 가져야 할까요. 안 좋은 것보다 좋은 것이 더 많다고 생각하면 그런 짜증이나 불만은 줄일 수 있습니다."
"언론이 부정적인 기사만 쓰면 독자들도 그 영향 받게 되요"
그러더니 그는 신문과 방송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정말 요즘 들어 이런 말을 왜 이리 자주 듣는지! 제가 이 인터뷰를 위해 만난 분 중 여러분이 이런 말을 한 걸 저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는 "고발과 폭로가 중요하지 않은 건 아닌데 이러다간 매스컴이 사회의 새로운 함정이 될지 모르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부정적인 걸 쓰는 만큼 좋은 것도 써야 사회가 균형을 잡을 수 있을 것"이라며 한 병원에서 환자들을 돌보는 사목(司牧) 신부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루는 그 신부님이 맨 날 환자들만 보고 있으려니 나도 여기저기가 아프고 이것도 저것도 아무 것도 안 된다.
이제 그만 둬야겠다고 하셔서 다른 곳으로 발령이 났습니다. 그 후에 만났더니 그 신부님은 이제 힘이 생긴다. 일할 맛이 난다고 했습니다. 바로 그런 겁니다.
부정적인 영향을 받으면 사람도 부정적이 되는 겁니다. 매스컴이 안 좋은 것만 쓰면 결국 독자들을 함정에 빠트리는 게 됩니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알겠습니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지요. 지금 생각하니 "그러겠습니다"고 대답해야 했던 게 아닌가 합니다.
■"50년 가까이 한국생활 이젠 佛고향 그립지 않아요"
그는 이런 말도 했습니다. "나도 세상에 추한 것, 기막힌 것, 고통스런 것 많이 보아왔습니다. 감수성이 많아서 인지 아주 가슴 아프게 본 일이 많았습니다. 그것을 극복해야 겠다고 평생 발버둥쳐왔습니다."
'아름다운 사람''아름다운 삶'을 이야기한다고 해서 소극적으로만 살아온 게 아니라는 말을 이렇게 한 것 같았습니다. 실제 그는 박정희 정권 말기, 안동교구장 11년째인 1979년 경북 일대에 번진 농민운동을 지원하다 당국으로부터 추방령을 받기도 했습니다.
우리나라와 바티칸의 외교마찰로까지 이어진 그에 대한 추방령은 두 달 만인 그 해 10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사망하면서 철회되었습니다.
이야기를 접을 무렵 몇 가지 사적인 질문을 해보았습니다. "고향과 가족이 그립지 않습니까" 같은 것들이지요. 그는 고향에 대해서는 "50년을 여기서 살았는데, 이제는 그립지 않습니다"고 말했습니다. "동생들이 조카나 조카 손자의 사진을 이 메일로 보내주는데 얼굴을 잘 모르겠고, 저쪽도 많이 달라져서 저쪽은 잘 모릅니다"라는 말이 이어졌습니다.
그의 프랑스 이름은 르네 듀퐁(Rene Dupont)입니다. 우리나라에 오자마자 이름을 우리 식으로 '두 봉'이라고 바꾸었습니다. 그는 '두견새(杜) 우는 봉우리(峰)'라고 뜻을 풀이해주었습니다. 그를 만나고 돌아오면서 두견새라, 우리 말로는 소쩍새인 두견새가 무엇을 상징하는지를 생각해보았습니다. 기다림, 절규, 그런 것들이지요.
그는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지, 평생 무엇을 기다려왔는지 생각해보았습니다.
어쭙잖은 질문은 아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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