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우리 국민이 내야 하는 세금 가운데 15%가량은 정책 실패와 방만한 예산운용의 대가로 지출되는 것으로 나타났다.본보와 경실련이 6일 올해 국민 세금의 쓰임새(예산지출 항목)를 함께 분석한 결과 금융구조조정과 의약분업 등 원칙없는 정책과 예산운용의 손실을 메우는데 국민 1인당 30만원 가량의 세금이 쓰이는 것으로 조사됐다.
특히 구 국가안전기획부의 총선자금 불법지원에서 드러났듯이 국민이 낸 세금이 부실의 차원을 넘어 불법자금으로까지 전락하는 등 운용의 총체적 난맥상을 보이고 있다.
■표준 한국가정의 세계부(稅計簿)
연소득 3,000만원으로 통계청 기준 표준 도시근로자 가정인 박모(42ㆍD기계 근무)씨 가족이 올해 내야할 세금은 최소 500만원 이상이다. 근로소득세 등 140만원이 원천징수되고 24평형 아파트에 재산세 6만원, 1,500cc급 승용차에 교육세 등 28만원이 부과된다.
출퇴근용 휘발유에 130만원, 담배에는 30만원이 교육세와 교통세 등 명목으로 포함되고 각종 소비 지출에는 120만~150만원의 부가가치세가 붙는다. 물론 적금을 타거나 부동산을 매매하는 등 별도 수입ㆍ지출이 있을 경우 세금은 큰 폭으로 늘어난다.
■정책 과오 대부분 국민에게 전가
이렇게 거둔 혈세의 상당부분은 정책 과오의 '처방약'으로 쓰인다. 회수가능성이 낮은 공적자금 투입액 중 이자는 전액 세금 부담. 올해 공적자금 이자(6조5,000억원)는 국민 1인당 14 만원의 세금이다.
의약분업 여파로 지난해보다 3,500억원 증가한 지역의료보험 지원금 1조9,000억원은 1인당 4만원의 혈세다. 올해 대폭 오른 의료보험료를 내야 하는 봉급생활자들에게는 이중의 부담을 떠넘기는 셈이다.
해마다 덩치가 커지는 대형투자사업은 세금 먹는 공룡이다. 지난해 정부는 항만 등 110개 대형투자사업비를 기존액보다 무려 2조3,000억원 증액했다. 올해 예산 반영분은 약 5,000억원(1인당 약 1만1,000원)으로 증가액 대부분은 설계 변경 등이 원인이다.
경실련은 "초기 판단 잘못으로 매년 투자비를 늘려 모두 국민에게 부담시키고 있다"고 지적했다. 경실련은 이밖에 선진국 사례시찰 등 불분명한 목적의 국외여비 361억원 등 136개 항목의 4조2,000여억원(1인당 10만원)이 중복편성 및 타당성 결여, 선심성 예산으로 삭감 가능한 지출이라고 분석했다.
■2001년을 국민 예산 감시 원년으로
공적자금 원리금 부담이 늘고 각종 연금 재정의 고갈이 현실화하는 2002년부터 국민 부담은 더욱 커지게 된다. 전문가들은 금융구조조정과 의료개혁, 농업구조개편 등 근본적 수술이 필요한 분야를 땜질 처방하는 관행이 재정부실화와 세금 낭비를 초래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서울시립대 세무대학원 임주영(林周瑩)교수는 "정부는 부실 실태 등을 정직하게 공개한뒤 국민합의하에 장기 재정계획을 세우고 국민들은 정부와 국회의 예산 편성 및 심의과정을 철저히 감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세금 내는 의무는 국민에게 있는데 그 권리는 왜 예산을 낭비하는 정부와 국회의원들만 갖는 건가요." "세금이 제대로 집행된다면 해마다 세금을 올릴 필요가 없지 않을까요."
청와대 홈페이지(www.cwd.go.kr) 게시판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이런 하소연처럼 많은 국민들은 자신의 세금이 제대로 쓰이지 않는 것으로 믿고 있다.
올해 국민 1인당 세금은 지난해보다 22%늘어난 253만원(지방세 포함). 4인 가구 기준 1,000만원을 돌파해 사상 최고수준이다. 하지만 세금이 국민에게 이익을 주는 곳에 효율적으로 쓰이지 못하고 있다는 불신은 커져만 가고 있다.
시민단체들은 무엇보다 예산편성 및 심의를 맡고 있는 정부와 지자체, 정치권이 세금 낭비의 주범이라고 지적한다. 경실련 예산감시위원회 관계자는 "일반행정비를 물가인상률보다 훨씬 높은 10.4%를 인상하고 예산심의 막바지에 수백건의 지역 선심예산을 끼워넣는 정부부처와 국회의 관행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필우(李弼佑) 한국납세자연합회장도 올해 1조6,000억원이 증액된 공무원 처우개선 자금과 관련, "정부가 공공부문 구조조정 등 자구의지만 보였다면 실직자들의 비난을 받지 않았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500억원 이상의 대규모 예산이 투입되는 국가 대형 투자사업은 대표적 관리 부실사례. 전년도에 책정된 총사업비보다 10% 이상 증액하는 것이 연례화해 부처마다 예산 늘리기에 열을 올려왔다.
기획예산처 관계자는 "지난해에는 각 부처의 요구액을 절반 이상 삭감해 2%가량만 인상했다"며 "전담 부서를 만들어 관리를 강화한 결과"라고 말해 사실상 이를 시인했다.
전문가들은 중요 정책이 잘못됐을 경우 실태를 공개하고 근본적인 대응책을 마련하는 대신 무조건 문제를 숨기려다 결국 국민에게 부담을 전가하는 정부의 태도를 비판하고 있다.
올해 증액된 예산 가운데 공적자금 이자와 의료보험 지원비가 32%를 차지하는 등 실패한 정책에 대한 국민의 부담은 커져가는데 정부는 숨기기에만 급급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농정개혁을 위한 법률은 만들지 않고 지난해말 농어촌 부채특별법을 전격 합의, 올해 당장 6,500억원의 추가 세금부담을 지운 정치권도 책임을 피할 수 없다.
이화여대 경제학과 전주성(全周省) 교수는 "공적자금은 종합적인 집행 계획과 부실 실태에 대한 설명도 없이 진행되다 국민 부담을 늘린 대표적 케이스"라며 "국민 부담이 불가피하다면 실상을 공개한 뒤 투명한 관리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조언했다.
일부에서는 연금재정 등 기존의 부실은 과거 정권의 잘못으로 돌리고, 공적자금 미회수분 등 예상되는 부실은 다음 정권의 책임으로 넘기는 악순환을 끊기 위해 특단의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세수 증가가 필요할 때면 소득에 따른 공평과세를 추진하는 대신 조세저항이 적은 간접세만 올리는 정책이 세금 전반에 대한 불신을 키운다는 주장도 있다. 올해 개인 소비자가 최종 부담하는 부가가치세와 유류에 붙는 교통세 및 특별소비세 등 간접세가 대폭 늘어 국민들은 사상 최고액의 세금을 내야 하지만 정부는 국민연금 공제 혜택으로 소득세 부담이 줄었다는 점만 강조하고 있다.
조세연구원 박종규(朴宗奎) 연구원은 "저소득층이 오히려 세금을 많이 낸다는 인식이 팽배한 상황에서 공적자금 등에 대한 세금 부담이 늘어난다면 조세제도 전반에 대한 국민의 불신은 더욱 커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경실련 예산감시위원회 부위원장인 이원희(李元熙) 한경대 교수는 "이제 국민의 당연한 권리를 찾아야 할 때"라며 "전문가집단과의 협력을 통해 올해를 국민 예산감시의 원년으로 만들 것"이라고 밝혔다.
최성욱기자
feelchoi@hk.co.kr
이상연기자
kubrick@hk.co.kr
송용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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