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가 내건 신년 화두는 신뢰회복이다. 1월 1일자 3면은 '시민들에게 듣는다'는 제목으로 전국 각 지역의 시민 16명의 사진을 싣고 그들이 매긴 우리사회의 신뢰점수와 가장 믿을 수 없는 대상이 쓰인 푯말이 함께 들어 있었다.표본의 선정과 점수 부여 방식에는 문제가 있었지만 시민의 소리를 직접 전하려 한 시도는 신선했다. 대부분의 언론사가 추상화한 여론조사의 통계수치로만 시민을 취급해온 관행을 과감하게 깬 기획이다.
더욱 공감을 자아낸 부분은 시민들이 부여한 신뢰점수와 믿을 수 없는 대상이었다. 신뢰점수는 높아야 77점, 낮은 경우는 20점으로, 계산해 보니 평균은 54.18점이었다.
학교에서는 이 정도 점수면 낙제를 면할 수 없다. 가장 믿을 수 없는 대상은 압도적으로 정치인을 꼽았고 정부와 공무원, 각종 정책을 믿을 수 없다고 한 사람을 더해, 정치인과 정부가 전체의 68%를 차지한다.
정치인와 정책지도층이 얼마나 심각한 불신의 대상인지를 잘 드러내 주는 결과이고 이는 많은 사람의 느낌을 적절히 대변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시민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기획은 이 정도에서 끝난다. 11면에 한국의 평균인들이 어떻게 사는가를 다룬 기사가 묻혀 있기는 하지만 그밖의 지면은 그렇게도 불신의 대상인 정치인과 고급관리들의 말과 약속, 또 경제인, 지식인들의 예언과 진단 등으로 가득차 있다.
언론인이 어떤 자세로 사실을 취재하고 사회적인 공통 관심사를 제시해야 하는가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이와 관련해 특히 주목할 대상은 신년특집호의 실질적인 1면 머릿기사다. 민주당 의원 세 명이 자민련으로 당적을 옮긴 사실을 다룬 이 기사는 소위 '발표저널리즘'의 나쁜 관행을 충실하게 지켰다.
명시적으로 드러난 취재원은 모두 셋으로,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의 신년사, 당적을 옮긴 세 의원의 기자회견문과 이같은 행동이 '정도가 아니다'라는 강창희 자민련 부총재의 말이 전부다.
액면 그대로 기사를 읽으면, 민주당의원 세 사람은 소수 여당의 한계와 거대 야당의 정치공세 때문에 좌초하는 개혁을 더는 두고 볼 수 없어서 이런 행동을 택한 것으로 이해된다.
과연 이 상황을 그렇게 읽을 사람이 얼마나 될까. 기자들은 그렇게 생각하는지, 세 의원의 지역구 사람들은 이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선진국에서도 이렇게 정당을 옮기는 경우가 있는지, 막후에 양당의 정치협상은 없었는지, 어째서 말 잘하는 양당의 원내총무나 대변인은 아무 말이 없는지 궁금하다.
언론인은 독자를 대신해 힘있는 사람들에게 질문을 제기하고 답을 추궁하는 특전을 부여받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 기사에는 대부분의 독자가 궁금해 하는 질문들이 모두 생략돼 있다.
더구나 '새해 정국 급속 냉각'이라는 제목은 마치 일기예보같은 기계적 관찰자 시점을 드러낸다. 세 의원이 한랭전선처럼 바람에 밀려 자민련으로 넘어갔는가.
언론이 질문자이기를 포기하면 민주정치의 토대는 무너진다. 기자가 정치인의 행동을 정치인의 시각에서 정당화하고, 따지기보다 그들이 하는 말을 받아 적어 그대로 독자에게 전달하는 일을 되풀이하는 한, 한국일보가 신년 화두로 내건 신뢰회복은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다.
신뢰는 투명성에서 나온다. 시민이 정치인을 믿게 되려면 정치기사가 먼저 변해야 한다. 오늘날 정치인들이 저렇듯 불신의 대상이 된 데는 언론의 책임도 크다.
이제 시점을 180도 전환할 때가 됐다. 정치인의 행동을 그들 관점에서 설명하려 하지 말고, 지역주민과 납세자 시점에서 문제를 제기하고 따져 볼 수는 없는가.
힘있는 취재원 중심으로 기사를 써온 오래된 언론관행을 하루 아침에 바꾸기는 어렵겠지만 남보다 앞서 시민사회를 주목해온 한국일보가 이번 신년 특집처럼 과감하게 시민의 소리를 담았듯 정치 경제 등 기사에서도 새로운 변화를 주도해 주기를 기대한다.
이재경ㆍ이화여대 언론홍보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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