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대총선 어떻게 치러졌나1996년 치뤄진 15대 총선은 역대 선거 중 돈이 많이 풀린 선거 중 하나로 꼽힌다. '입은 풀고 돈은 막는다'는 취지로 제정된 통합선거법이 처음 적용된 총선이었지만 선거 후 야당이 '돈 선거' 시비를 강하게 제기하는 등 후유증도 컸다.
검찰수사 결과 안기부 자금 500억원이 여당의 선거자금으로 사용된 것에 대해 선거에 밝은 전문가들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당시 여당인 신한국당은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려 있었다. 1년 전인 1995년 6월27일 실시된 지방선거에서 여당인 민자당은 15개 시ㆍ도지사 자리 중 불과 5석 밖에 얻지 못하는 참패를 했다. 서울에서는 시장 선거에서 진 것은 물론 23개 구청장 자리 가운데 2석 밖에 얻지 못했지만 깨끗한 선거였다는 평을 받았다.
그러나 상황은 1년만에 급변했다. 15대 총선에서 신한국당이 원내 과반수는 확보하지 못했지만 서울의 47개 의석 중 27석을 차지하는 등 모두 139석(전국구 포함)을 획득, 정치적 승리를 거둔 것이다. 당시 신한국당은 '필승'을 위해 막대한 자금을 풀었고 '총선을 위해 개혁을 희생했다'는 소리까지 들었다.
문민정부 당시 정무수석을 지낸 주돈식(朱燉植)씨는 회고록에서 "6ㆍ27지방선거 패배 후 '이기는 자만이 말할 수 있다'는 김영삼(金泳三) 대통령의 '승자(勝者) 철학'이 무게 있게 들리기 시작했다.
개혁한다고 표가 오는 것은 아니다는 식으로 개혁의 의미를 정리하고."라며 분위기를 전했다.
신한국당에서 자금과 조직에서 총선을 지휘한 사람은 김현철(金賢哲)씨라는 것이 정설이다.
막대한 돈을 들인 여론조사를 통해 공천과 선거전략을 정했고, 야당의 핵심 인물들을 낙선시키기 위해 서울과 수도권에서 표적 공천을 한 뒤 집중적으로 자금을 지원했다는 것이다. 단속망을 피하기 위해 '기업과 후보'를 직접 묶어주기도 했으며, '자원봉사자'명목으로 운동원을 고용, 일당을 주며 '구전 홍보반'등으로 활용했다.
당시 신한국당 강삼재(姜三載) 사무총장은 "각 지구당에 1억원씩 지급했다"고 밝혀 구설수에 올랐지만, 야당에선 "여당에서 국고보조금 등 공식자금 1,100억원을 포함 수천억원의 자금을 풀었다"고 주장했다.
정가에선 한보 사건 수사결과 드러났듯 김현철씨와 안기부 기조실장이었던 김기섭(金己燮)씨의 커넥션이 총선에서도 위력을 발휘했을 것이며, 안기부 자금 500억원 지원도 이 같은 여권의 총체적인 필승전략의 일부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
이태희기자
taeheelee@hk.co.kr
■15대총선 신한국 지휘체계…이원종씨도 핵심역할
신한국당은 15대 총선 당시 외형상 투톱 체제로 운영됐다. 총선을 앞두고 영입한 이회창(李會昌) 선대위의장과 박찬종(朴燦鍾) 수도권 선대위원장이 유세현장을 돌며 선거를 진두지휘하는 형식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당의 얼굴 역할만 했을 뿐, 공천과 자금집행 등 주요 실무는 선대 본부장이었던 강삼재(姜三載) 사무총장이 총괄 지휘했다.
김윤환(金潤煥) 대표 역시 핵심 실무에 관해선 사이드로 밀려 있던 처지였다. 강삼재 선대본부장 직속에는 강용식(康容植) 선거 기획단장이 있었으나 그의 역할 역시 전략분석 등 한정적 영역에 머물렀다.
자금 조달과 배분 루트를 중심으로 선거 지휘 계통을 다시 뜯어보면 그 정점에는 강삼재 선대본부장과 김영삼(金泳三) 전 대통령의 차남 김현철(金賢哲)씨, 이원종(李源宗) 청와대 정무수석 등 3인이 있었다. 여권 특성상 모든 자금이 한 통로로 흐르긴 어려웠고, 실제로 당이 갖고 있던 '공식 자금'은 강삼재 선대본부장을 통해, '비공식 자금'은 김현철씨를 통해 배분됐다는 게 정설이다.
공식 자금은 모든 후보에게 공통적으로 배분되는 자금이었고, 비공식 자금은 전략적 가치에 따라 차별적으로 배분되는 자금이었다. 비공식 자금은 크게 대통령 선거 때 쓰고 남은 자금,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안기부 자금, 유력 기업에 부탁해 후보에게 지원하는 자금 등이 있었다는 게 당시 관계자들의 공통된 증언이다.
선대위에서 핵심 실무를 담당했던 한 관계자는 "공천과 자금 문제 모두를 당이 안기부와 직접 거래하지는 않은 것으로 기억한다"면서 "안기부 자금을 움직일 정도의 위치에 있었던 사람은 이원종씨와 김현철씨였다"고 말했다.
홍희곤기자
hghong@hk.co.kr
■안기부 '통치자금'이란
구 안기부(현 국정원)가 YS정부 때인 1996년 신한국당에 지원한 수백억원대의 선거자금이 검찰 수사선상에 오르면서, '안기부의 통치자금'이 다시 초점으로 부상하고 있다.
과거 정권에서 '알려고 하지도 말고, 알아서도 안되는' 금기사항이었던 안기부의 자금이 처음 공개적으로 도마에 오른 때는 1998년 4월. 당시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은 아시아ㆍ유럽 정상회의(ASEM) 참석을 위한 출국에 앞서 국정원의 고위관계자가 '관행'이라며 상당액의 안기부자금을 비공식 경비로 사용할 것을 건의하자 단호하게 거절했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소문으로만 떠돌던 안기부 통치자금의 실체가 확인됐다. 그 해 말 국정원은 예산 중 250여억원을 국고에 반납했다. 이후 이 예산이 삭감되면서 여권의 '돈 줄'이 말라 정치력 약화의 한 원인이 됐다는 분석도 있으며 현 임동원(林東源) 국정원장은 남아있는 '원장 기밀비'마저 쓰지 않아 여권내에서 "전혀 협조하지 않는다"는 불만을 사고 있다.
안기부의 통치자금은 자체 예산과 기업체 모금으로 구성되며 정권에 따라 조성방법과 규모가 달랐다. 전두환(全斗煥) 노태우(盧泰泰) 전 대통령은 재임시절 6,000억~7,000억원의 자금을 기업으로부터 걷워 그 중 상당부분을 안기부가 관리토록 했다. 문민정부 시절에는 기업자금보다는 안기부 예산이 통치자금에서 차지하는 몫이 더 커졌다. 당시 관리책은 김현철(金賢哲)씨의 측근인 김기섭(金己燮) 기조실장이었다.
안기부 예산은 지금의 국정원에서도 그렇지만 본예산과 예비비로 구성돼 있다. 금년도 국정원의 본예산은 2440억원, 예비비는 4200억원 수준이며 어느 일에, 얼마가 쓰이는 지는 다른 나라처럼 철저히 비밀에 부쳐져 있다.
안기부 예산 중 예비비는 실제 안기부보다는 각 부처가 주로 쓰는 돈이다. 예를 들어 국방부가 특수부대를 운영할 경우 보안유지를 위해 그 비용을 안기부 예비비로 편입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안기부는 예비비에 대한 감사ㆍ감독권을 가질 뿐이지 그 전부를 자신들이 쓰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안기부 예산으로 조성한 통치자금은 본 예산에 주로 숨어있고 일부는 예비비에서 염출했다고 봐야 한다. 이 자금의 근거는 중앙정보부법부터 있어 온 '비밀활동비를 다른 기관의 예산에 계상할 수 있다'는 규정과 '국가안전보장 활동비'를 예비비에서 배정할 수 있도록 한 예산회계특례법의 규정이다.
이영성기자
leey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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