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한해 사이 세상이 이렇게 달라질 수 있을까. 우리 경제 형편과, 정부에 대한 신뢰가 급전직하(急轉直下)한 것을 새삼 들먹이는 게 아니다.'냄비 사회'라는 우리뿐 아니라, 국제 사회도 1년 전 뉴 밀레니엄의 환상에 물색없이 들떴던 것에 스스로 황당해 하며 우울한 경제 전망과 함께 새해를 맞았다.
영국 런던 그리니치에 있는 밀레니엄 돔의 뒤바뀐 운명은 역사 지식을 총동원한 새 천년 찬가가 졸지에 탄식으로 변한 상황을 상징한다.
세계 표준시(GMT)의 기준점에 12억 달러를 들여 세운 밀레니엄 돔은 전 세계에서 가장 야심적이고 화려한 새 천년 프로젝트였다.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는 영국을 '시간의 고향', 역사의 출발점이라고 선언했다. 일찍이 '세계화'를 주도한 옛 대영제국의 자존심의 표현이었고, 런던이 세계의 중심이던 빅토리아 여왕 시대를 회상하는 분위기와 맞물렸다.
이 밀레니엄 돔이 진짜 새 천년을 앞둔 지난 연말 기약도 없이 폐쇄 됐다. 연간 1,200 만명을 예상한 관람객이 절반에도 못 미쳐, 정부 복권기금에서 2억7,000만 달러를 지원 받아야 했던 운영난 때문이다.
영국 정부는 밀레니엄 돔을 일본 노무라 그룹에 1억5,500만 달러에 넘겨 테마 파크로 운영하려다 무산되자, 결국 다른 용도로 민간에 팔기로 하고 전시물을 경매하기 시작했다.
천년의 영광을 과시하려던 야심이 1년도 못 가 좌절한 것은 시간의 역사를 보여 준다는 밀레니엄 돔이 국민의 상상력을 자극하지 못한 탓이다.
총리 측근 정치인이 맡았던 관리 책임자를 몇 차례 바꾼 끝에 프랑스 디즈니랜드 사장을 영입한 관리능력 부족도 원인이다.
그러나 근본은 20세기 막바지 일시적 경제적 성취에 스스로 현혹돼, 미지의 새 천년 청사진까지 화려하게 치장한 오만과 단견 때문이란 지적이다.
신중한 영국인들을 경박한 졸부처럼 만든 것은 무엇일까. "상상력의 미국 식민지화"탓이란 지적이 재미있다.
미국이 이끈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에 편승, 미국을 추종하는 '제 3의 길'을 표방하고 경제는 물론 교육 의료 복지 등 모든 사회 정책에서 영국적 전통을 벗어난 맥락에서 밀레니엄 돔의 발상이 싹텄다. 그리고 이것이 국민의식과 사회구조와 크게 어긋난 것이라고 분석한다.
이런 분석은 2000년 초입의 들뜬 분위기가 미국 경제의 침체 조짐과 함께 일시에 반전된 것에서 20세기 마지막 10년을 지배한 '미국형 경제모델'의 퇴조를 점친다. 자유와 경쟁을 절대 가치로 내세운 미국 모델의 신화가 퇴색하고, 사회 정의와 연대(連帶) 등에 기반한 '유럽 모델'이 다시 21세기 유럽의 지향점으로 회귀하고 있다는 것이다.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서유럽 주요 국가에서 집권하고 있는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이 '제 3의 길'논리를 더 이상 떠들지 않는 것과 함께 주목할 만한 변화다.
경제 상황에 따라 언론과 경제학자 들마저 이론을 바꾸는 '여론의 경기적 변화'탓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미국의 세계화 논리와 추진력은 1999년 시에틀 WTO(세계무역기구) 정상회담이 결렬되면서 추락하기 시작했다.
이어 지난 10년간 국가 경쟁력에서 사실은 독일 등 유럽과 일본이 여전히 미국보다 앞섰다는 분석이 잇따라 나왔다.
그리고 이제 폴 크루그만 등 미국 경제학자들이 금융과 증시, 지식기반 산업과 IT 산업 등에 매달린 신경제의 허상을 신랄하게 지적한 글을 미국적 논리의 전도사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이 어제 아침 지면에 나란히 싣기에 이르렀다.
미국의 경제력이 막강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문제는 경제적으로 목을 매달고 있는 미국의 경제 모델마저 최선으로 여기는 것이다.
파이낸셜 타임스의 논평가 마틴 울프는 "경제학자들은 문화를 싫어하지만, 사회적 문화와 역사적 토양이 다른 나라들의 경제 모델도 달라야 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경제도 길고 넓은 안목으로 봐야 한다는 얘기일 것이다.
강병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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