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의 영국은 '해가 지지않는 나라'가 아니라, '해가 뜰 가망조차 없는 나라'였다. 과잉 사회복지, 공공부문의 비대화, 초강성 노조.. 경쟁도 효율도 의욕도 없던 영국경제에 73년 오일쇼크는 살인적 스태그플레이션(경기침체+인플레)을 안겨줬고, 파운드화는 투매 바람속에 끝없이 추락했다. 76년12월 영국은 마침내 '국제통화기금(IMF) 신탁통치'의 굴욕을 감수해야 했다.죽어가던 영국경제를 소생시킨 주인공은 '철의 여인' 마가렛 대처 수상이다. 79년5월 집권한 보수당의 대처 수상은 '냉혈한' '독선에 빠진 암소' '독재자' 등 온갖 비난과 저항속에서도 카리스마적 리더십과 정면돌파식 구조개혁으로 불치에 가까워보였던 영국병을 기적적으로 치유했다.
'국가를 통치하는 것은 정부 아닌 노조'란 말이 나올 만큼 영국의 노조파워는 막강했다.
비대해진 '노조권력'을 줄이지 않는 한 경제회생은 불가능했다.
대처 수상은 집권 초부터 노조와 정치생명을 건 싸움을 시작했다. 80년 노조간부의 면책특권 제한을 시작으로 ▦82년 노조대표 선출 및 파업결정시 비밀투표 의무화 ▦84년 동조ㆍ지원파업 금지 ▦88년 클로즈드숍(노조의무가입) 조항삭제 ▦90년 노동자의 노조 비가입 보장 등 초강경조치가 이어졌다.
하이라이트는 탄광노조 파업이었다. 84년3월 전국 20개 탄광폐쇄와 2만명의 인력감축을 골자로 한 석탄산업 구조조정 계획에 대해 탄광노조(NUM)는 총파업으로 맞섰다. 그러나 타협에 익숙했던 과거 정권과는 달리, 대처 수상은 협상단 대신 경찰력을 보냈다.
"법이 폭도의 논리에 제압될 수 없다"고 선언한 대처 수상은 아예 고용법을 개정, 투표없는 파업을 불법화했다. 파업은 1년 넘게 지속됐지만, 그녀는 한걸음도 물러서지 않았고 결국 85년3월 탄광노동자들은 '백기'를 든 채 직장으로 복귀해야 했다. 대처 수상이 집권했던 79년 2,125건에 달했던 파업은 85년 903건으로 줄었다.
대신 대처 수상은 실직노동자를 실업급여와 재교육 프로그램등 사회보장제도로 흡수했고, 노사간 공동협의위원회를 설치해 노동자의 경영참여폭을 확대했다. 또 종업원지주제, 이윤배분제 등을 통해 협력적 노사관계의 과실이 노동자들에게 돌아갈 수 있도록 했다.
'큰 것은 정부가 다 집어삼킨다'는 말이 나올 만큼 영국 경제는 국영과 독점의 천국이었다. 공기업들은 독점적 가격에 안주한 채 경쟁도 없고, 평생월급이 보장되는 고비용ㆍ저효율의 영국병을 압축하고 있었다.
대처수상은 79년 영국석유(BP)를 시작으로 81년 영국항공(BA), 86년 영국가스(BG), 그리고 영국통신(BT) 로버자동차 등 대형 국영기업들을 팔았다. 79~83년 12개 공기업 민영화을 통해 영국정부는 16억2,500만파운드의 재정수입을 올렸다. 공기업 민영화는 경제의 효율ㆍ생산성 증대외에도 과도한 사회보장지출로 파탄에 빠졌던 재정을 건실화해주는 '효자' 노릇을 했던 것이다.
정부 스스로 제살을 도려내는 아픔을 보이지 않고 노동자에 희생을 요구할 수 없었다. 대처 수상은 차량등록 여권발급 등 110여개의 행정서비스를 아웃소싱하면서, 80년 75만에 달하던 공무원수를 87년 64만명까지 줄였다. 공무원수가 줄고 정부가 작아지면 규제도 약해질 수 밖에 없다. 해외자본수혈을 통한 경제회생과 고용창출을 위해 외국인투자규제를 대폭 완화했고, 증권수수료 규제를 철폐한 금융자유화로 '빅뱅'을 주도했다.
대처 수상의 고집스런 구조개혁은 400만명에 달하는 실업자를 양산하고, 빈민들의 사회복지혜택을 축소하는 등 부작용도 많았다. 하지만 고통의 결과, 무기력과 도덕적 해이로 경제의 생기를 갉아먹었던 영국병은 치유됐다.
집권초 구조조정 충격에 마이너스로 떨어졌던 성장률은 80년대 중반 이후 5%이상으로 높아졌다. IMF체제를 겪은 지 25년, 대처의 개혁이 시작된 지 20년이 지난 지금 영국은 세계에서 가장 투자하기 좋은 나라로 꼽히고 있다.
이성철기자
sclee@hk.co.kr
■대처식 개혁의 시사점
대처 수상의 구조개혁 성과 가운데 가장 눈여겨볼 대목은 공공ㆍ노동개혁이다. 우리나라의 4대 개혁과제 가운데 가장 미지한 분야로, '한국병' 치유를 위해선 두 분야에 대한 정면돌파가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대처식 공공개혁의 핵심은 공기업 민영화와 정부기능ㆍ인력감축이다. 공기업 민영화의 부작용(고용ㆍ가격불안)에 대한 우려도 많았지만, 영국은 석유 항공 가스 등 굴지의 초대형 공기업의 민영화를 단행했고, 결과적으로 인플레와 고용 모두를 잡았다. 또 정부인력 감축은 기능축소(민간이양 및 규제완화)와 병행되어야 성공할 수 있음을 보여줬다.
'노조를 등지면 선거는 꿈도 꾸지 말라'는 것이 당시의 영국정치였고, 실제 구조조정 추진 3년차였던 81년 대처 수상의 인기도는 역대 수상중 최악인 25%까지 추락했지만, 그는 잘못된 노조관행에 서슴없이 메스를 들이댔다.
그렇다고 대처의 정치기반이 처음부터 튼튼했던 것은 아니었다. 보수당내 소수파 출신으로, 집권 초엔 긴축 및 구조조정 추진 때마다 야당은 물론 당내 다수파로부터도 견제와 반대를 받았지만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
25%의 지지율과 소수정권의 한계속에서도 원칙대로 밀고 나갔던 대처 수상은 훗날 "당장의 인기는 중요치 않다.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실행할 용기가 있다면 결국 대중의 존경을 받게 될 것이다"고 말했다. 인기율 하락과 국회의석수에 조급해하는 현 정부ㆍ여당이 반드시 되새겨야할 대목이다.
이성철기자
sclee@hk.co.kr
■북유럽 3개국의 금융위기-신속·투명성으로 돌파
스웨덴 핀란드 노르웨이 등 북유럽 3개국은 1990년 초 은행 부실로 위기를 맞자 우리나라처럼 공적자금을 투입했다. 그러나 이들 나라는 부실 발생 초기단계부터 은행별 손실과 처리계획을 명확히 공개, 시장불안을 최소화하고 기존주주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책임을 추궁해 시장의 신뢰를 신속히 회복할 수 있었다.
또한 복지ㆍ노동ㆍ공공부문 등 경제 전 부문에서 비용을 줄이고 효율성을 높이는 철저한 개혁을 추진, 4년여만에 위기를 완전 극복했다.
△위기의 성격
3개국의 금융위기는 경기침체로 은행 대출이 일시에 부실화한데 따른 것이다.
1980년대 중반 금리자유화, 대출상한 폐지에 따라 은행들은 외화차입을 통해 경쟁적으로 대출을 늘렸고, 대출중 50%는 주식ㆍ부동산 매입에 사용됐다. 90년대 초 경기침체로 자산가격이 폭락하자 대출손실이 급증, 은행들은 지급불능사태에 직면하고 기업의 연쇄도산했다.
△은행부실 처리과정
스웨덴의 경우 91년 이후 부실대출이 급증하자 1단계로 각 은행의 손실추정액과 처리계획을 공표, 시장불안을 최소화했다. 이후 은행을 세등급으로 분류,
우량은행은 주주들이 문제를 해결하도록 했고, 일시적으로 BIS(국제결제은행) 자기자본비율이 8%이하로 하락한 은행은 정부가 출자ㆍ출연을 통해 지원했다. 자본잠식가능성이 있는 은행은 청산ㆍ합병ㆍP&A(자산ㆍ부채인수) 방식으로 조기 정리했다. 특히 지원과정에서 기존주주에 대해서는 정부의 지원규모만큼 감자(減資)를 단행, 책임을 명확히 했다.
노르웨이는 92년 3개 대형 상업은행을 국유화한뒤 인력ㆍ조직 감축과 경영합리화 과정을 통해 금융위기가 완화하자 3년만인 95년 정부 지분을 시장에 매각했다. 핀란드는 91년 이후 4년동안 50여개 상업은행과 소형 저축은행들을 3개 주요 은행그룹으로 합병ㆍ재편했다.
△전방위 경제개혁
93년을 전후로 위기가 진정국면에 들어서자 이들 나라는 위기재발 방지를 위해 노동ㆍ공기업ㆍ사회복지 전 부문에 걸쳐 일대 혁신을 벌였다. 노동부문에서 핀란드는 근로시간법을 제정, 노사간 협약에 따라 신축적으로 근로시간을 운영할 수 있도록 했고 노르웨이와 스웨덴은 해고를 가로막는 각종 규제를 완화했다.
복지부문에서도 주택보조금 삭감, 실업보험 수령자격 강화, 의료지원비 감축 등 사회복지예산을 대폭 줄여 재정 건전화를 도모했다. 서유럽에 비해 상대적으로 비대했던 공공부문의 경우 전력 통신 등 기간산업을 민영화하고, 공무원에 대해서는 우대조치 폐지와 인원감축을 단행했다.
유병률기자 bryu@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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