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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춘문예/희곡당선작 '너에 대한 추측'(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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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춘문예/희곡당선작 '너에 대한 추측'(2)

입력
2001.01.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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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소리가 무대에 흐른다.여인; (신이 난 듯) 그래, 바다. 겨울엔 쓸쓸하고 춥지만 여름엔 아주 시원해.물빛은 초록빛이지. 배가 지나며 물살을 가르면 초록빛물이 하얗게 칼처럼 일어서.

참 아름다운 모습 이야.난 바닷가에서 자랐단다. 그래서 항상 바다가 그리워. 바단 말이다, 바람이 불면 물이 마치 칼을 품은 듯 출렁거린단다. 너 바다를 본 적이 있니?

소년; 아뇨.

여인; 바다가 보고 싶지 않니?

소년;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며) 모르겠어요. 바다는 별의 강 은하수 같은 건가요?

여인; 글쎄. 바다는 저 강을 닮았단다. 시원하고 큰 가슴을 가졌지. 그건 무시무시할 지경이야. 너에게 꼭 바달 보여주고 싶어.

소년; (고개를 갸웃갸웃하며) 바다? 바아다? 바아아아다?

여인; 또 바다 냄새는 어떤지 아니? 그건 미역 냄새, 피 냄새, 오래 떠도는 혼의 냄새야. 가 보고 싶지 않니?

소년; 가 보고 싶어요. 전 바다에 꼭 가고 싶어요.

여인; 그래 너 가 보고 싶지?

소년; 네, 가 보고 싶어요. 하지만 전 갈 수 없는 걸요. 아버질 지켜봐야 하는 걸요?

여인; 세상엔 또 좋은 게 있어. 그건 꽃이 필 때란다. 꽃은 세월이 지나가는 길목언저리에 해마다 한 번씩 피어난단다. 너 꽃을 아니? 난 꽃을 사랑해.

소년; 저도 조금은 알아요. 저도 꽃을 사랑해요. 여기 물구나무 서서 기다리고 있으면 먼 곳에서 핀 들꽃의 향기가 떠돌다가 여기까지 저를 찾아오거든요.

여인; 꽃은 누군가를 위해서 피어난 게 아니지만 그 아름다움에 모두들 감사한단다.

그러나 꽃은 속절없이 시들어버리지.

소년; 모든 게 그렇지요. (검지로 코밑을 비비며) 아 참! 당신에게 궁금한 게 있어요.

여인; 뭐가 궁금한데?

소년; 그 커다란 가방 속에 무엇이 있나요?

여인; 무슨 가방?

소년; 하하,당신에겐 가방이 있어요. 당신의 가방 말이에요. 시침 떼지 마세요.

여인; 아, 내 가방. 음 그건 비밀이야?

소년; 말해주세요.

여인; 안돼.

소년; 제발 말해주세요. 저두 당신의 소원을 들어줄께요.

여인; 정말?

소년; 정말이에요. 난 당신의 남편처럼 약속을 지키지 않고 떠나버리진 않아요.

여인; 내 부탁부터 들어줘. 그러면 내 가방 속에 무엇이 들었는지 알려줄께.

소년; 무슨 부탁인데요?

여인; 난 열매를 가졌어. 열매를 맺을 수 있게 도와줄 수 있겠니?

소년; 어떻게 돕는 건데요?

여인; 네가 결심만 하면 어려운 일은 아니야.

소년; 그런 거라면 물론 도와줄 수 있어요. 하지만 당신이 건강하지 않기 때문에 걱정이 돼요. 당신은 아직 슬픔을 버리지 않았잖아요.

여인; (고개를 떨구며) 그래. 난 아직 슬프단다.

소년; 저는 당신을 돕기 위해 강을 건너왔는지도 몰라요. 당신이 슬픔을 버리는 걸 돕고 싶어요.

여인; (우는 듯 웃으며) 곧 슬픔은 버릴 수 있단다. 난 너의 도움이 필요해.

소년; 도와줄 수 있어요.

여인; 하지만 우린 헤어지게 되겠지?

소년; 헤어지게 되겠지요. 세상이 기울어진 탓이에요.

여인; (담담하게) 알아.그렇게 되겠지. 하지만 다시 만날지도 몰라. 먼 훗날에는.

소년; 두렵지 않아요?

여인; 두려울 건 없어. 내가 나를 버리면 거기 생명이 있을 테니까.

소년; 당신이 당신을 버리는 게 말처럼 쉬운 일 은 아녜요. 내가 저 위험한 강을 건너온 것보다 훨씬 더 위험할지도 몰라요. 두렵지 않아요?

여인; 위험한 건 두렵지 않아.

소년; 좋아요, 그럼 당신을 도와줄 수 있어요.

여인; 좋아! 그럼 내 가방 속에 있는 걸 보여줄께. 자,이거야!

소년; 북이로군요. 정말 멋져요!

여인; 이걸 너 줄께.

소년; 정말이에요?

여인; (고개를 끄덕끄덕) 한번 두드려봐!

소년; (북을 두드린다) 정말 멋져요!

여인; 네가 북을 치니까 세상이 너무나 평화스러워지는 것 같다. 너무 먼 길을 단숨에 달려왔나 봐. 아,피곤해. 아무 생각없이 자야겠어.

소년; 그러세요. 생각을 텅 비우면 황홀한 잠을 잘 수 있어요.

소년이 북을 치면 태동소리 점점 커진다. 곧 이어 일정하게 잦아들다가 아득해진다.

무대 왼쪽 산부인과병원 상담실. 어머니와 의사가 얘기를 나누고 있다

어머니; 선생님 이 일을 어쩌죠?

의사; 내버려두면 산모가 위험해집니다. 초산인데다가 자궁이 선천적으로 약해요.전부 그런 건 아니지만 이런 경우 산모의 생명을 잃을 수도 있어요. 굳이 아일 낳아 기르고 싶어한다면 꾸준한 입원 치료가 필요합니다.

어머니; 애를 낳다니 말이나 됩니까? 어떻게 해서라도 막아야지요.

의사; 따님이 남편 되시는 분과 퍽 의가 좋으셨던가 봅니다.

어머니; 좋긴요. 부부가 정이 없어서 그런지 상 치를 때도 멀뚱멀뚱 남의 초상집 구경이라도 온 것처럼 굴더군요. 내가 사돈댁에 민망해서 아주 혼났어요.

의사; 그렇다면 모성애 때문일 겁니다. 초기엔 아주 원치 않는 임신일 경우에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그럴 맘이 없어지는 경우가 많거든요.

아이 때문에 평생을 바쳐 헌신한대도 낳아야겠다는 마음이 생기는 거죠. 모성애란 원시적이고 무서운 힘이거든요.속히 손을 쓰셔야 할 겁니다.

어머니; 나두 앨 키웠는데 그걸 모르겠수?

의사; 전 한창 나이에 유복자를 잉태하셨다길래 수술을 권유했습니다만.

어머니; 꽃다운 나이에 애 딸린 과부가 되다니 어디 말이 됩니까? 그런데도 앨 낳겠다고 고집을 피우길래 아주 혼구멍을 내 줬죠. 우리 앤 아직 인생을 몰라요 철이 없죠.

의사; 그나저나 큰일입니다. 만약 따님을 설득하지 못하신다면 산모의 위험을 감수해야 합니다. 속히 산모를 설득해 보세요. 전 다음 환자가 기다리고 있어서. 이제 그만 가보시죠.

어머니 퇴장하고 전화벨이 울린다. 의사 수화기를 들며,

의사; 여보세요, 네 산부인과 맞습니다. 네, 와서 진찰을 받아보세요. 수면제와 알콜을 복용한 상태라면 태아에게 위험하겠지만 장담할 수 없습니다. 생명이란 건 신비해서.직접 병원으로 찾아와서 저와 상담을 하는 게 좋겠습니다. 네 그럼 이만.

무대 오른 쪽에서 전화벨이 울린다. 병실이다. 어머니 어디론가 전화하고 있다.

어머니; 딸자식이라고 하나 있는 게 새파란 나이에 이런 봉변을 당할 줄이야 누가 알았겠어? 뭐 어떡하긴. 좀 놔뒀다 재혼시켜야지. 미쳤다고 멀쩡한 앨 과부 노릇을 시켜? 안하겠다면? 안하겠다면 목에다 고삐를 매서라도 시킬거야.

아직 애도 없는데 잘됐지 뭐야. 여기? 응 병원이야. 얘가 초상 치르느라고 몸살이 났거든. 어디 마땅 한 상대가 있는지 좀 알아봐줘.전화 끊자. 왔나 부다. 그래 잘 부탁해.

여인; 엄마 아직 안갔어?

어머니; 몸도 성치 않은 너 혼자 두고 가긴 어딜가?

여인; 괜찮아, 혼자 있고 싶으니까 엄만 그냥 집에 가.

어머니; 너한테 할 말 있다. 앉아라.

여인; 할 말? 할 말이 뭔데요?

어머니; 어쩔 거야?

여인; 어쩌다니? 뭘요?

어머니; 애 말이야.

여인; 애가 뭘?

어머니; 얘, 눈 딱 감고 수술하자. 응?

여인; 싫어. 왜 그래 엄만. 그이가 얼마나 기다린 앤데.

어머니; 아니, 얘가. 너 미쳤니? 사내 없이 어떻게 앨 키우겠다는 거야. 게다가 의사 선생님이 그러는데 너 자궁이 약해서 위험하대.

여인; 싫어.애를 지우다니 어떻게 그런 일을 해?

어머니; 다 널 위해서 그러는 거야.

여인; 엄마 미안해.하지만.

어머니; 하지만은 무슨 하지만이야. 네가 뭘 알아. 내 말대로 애 지우자. 응? 이 에미 소원이다.

여인; 엄마 미안해. 난 그런 짓.

어머니; 미안이고 나발이고 내 말대로 해. 넌 몰라. 인생이란 건 잔인한 거다. 이건 네 에미로서 하는 말이 아니고 너보다 먼저 인생을 산 사람으로서 하는 말이야.

(호령하듯) 네가 감히 내 말을 거역하려는 게냐?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이것아.내가 네 아부지 없이 너하고 네 오빠 키우면서 무슨 생각했는지 알아?

넌 내가 재혼생각 꿈에도 없었는 줄 아니? 아니다,난 재혼하고 싶었어. 네 아부지 대신 그 자릴 지켜줄 든든한 남자가 있었으면 했다구.

여인; 그럼 엄만 날 왜 낳았수?

어머니; 그래서 인생이 잔인한 거라잖니. 널 나처럼 살게 하고 싶진 않다.

여인; 엄마 미안해. 난 애 낳아서 혼자 기를께요. 재혼 같은 거 할 생각 없어.

어머니; (타이르듯) 넌 배웠다는 애가 왜 그렇게 미련맞니? 어떻게 먹고 살거야? 너 솔직하게 말해봐! 이 에미 가슴에 못이라도 박고 싶어서 그러니? 응?

여인; 그런 게 아녜요!! 엄마. 모르겠어요, 잘 모르겠어. 그냥 낳고 싶어.

어머니; 흥!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도 마라. 병원 의사 선생님도 네 체질로 출산하는 건 위험하다고 했어. 너도 날 닮아서 애기집이 약하단다. 지금 건강 상태도 안좋구.그러니 이 앤 지우구 새로 시집 가서 앨 낳으면 될 거 아니니. 안 그래?

여인; 엄마, 그이 죽은 지 며칠이나 됐다구 그러세요.

어머니; 넌 아직도 내 말을 못 알아듣는구나. 도대체 왜 고집을 부리는거야, 응? 잔소리 말구 수술하는 거다.

여인; 엄마, 내 자식이에요. 내 자식 내가 낳겠다는데 엄마가 왜 이러세요,정말!

어머니; (격해서) 내가 왜 이러냐구! 난 네 에미야, 넌 내 새끼구, 에미는 제 새끼 불행해지는 거 못보는 법이야.난 네 혹같은 자식새끼보다 금쪽같은 내 자식새끼가 더 중요해! 내 딸 인생 망칠 흉한 혹 같은 자식 따위 낳지 말란 말이야!!

여인; 엄마, 알았어. 생각 좀 해보구 엄마 말대로 할께.

어머니; (잡아채듯) 알았으면 됐다. 생각 하구 자시구 할 게 뭐 있니. 당장 수술하는 거다. 눈 딱 감아라. 이런 일은 그저 맘 먹었을 때 후딱 해치우는 거야. 어서 이리 와. 가자!

의사 수술대를 끌고 나온다. 여인 어머니에게 끌려 수술대에 오른다. 고무장갑을 낀 의사가 거대한 마취주사로 여인을 위협한다. 위험한 음악이 고조된다. 어머니는 옆에서 외친다.

어머니; 눈 딱 감아라. 잠깐만 참으면 돼!

여인; 엄마 무서워!

어머니; 다 널 위해서 그러는거야!

여인; 엄마 무서워 죽겠어!

고무장갑을 낀 의사의 손이 위협적으로 보인다. 여인과 어머니의 외침소리 음악과

함께 무대를 장악한다. 아비규환 같은 무대에 불쑥 소년이 튀어나온다. 의사가 소년의 목을 조르려고 따라다닌다. 소년 살려달라고 소리지른다.

의사는 소년을 위협적으로 따라다니고 어머니는 눈 딱 감으라고 소리지르고 여인은 무섭다고 외친다.

등장인물들 각기 자기 대사를 힘껏 외친다. 의사가 드디어 소년을 움켜 쥔다. 소년 버둥거린다. 여인이 달려와 소년을 와락 끌어안으며 모든 소리들 뚝 정지된다.

여 인; 안돼요!! 살려주세요. 이 앤 살아야 해요.

북소리가 생명의 멈출 수 없는 맥박처럼 숨가쁘게 울린다. 잠시 후 소용돌이가 지나가고 무대 환하게 밝아지면 맹꽁이처럼 배가 불룩해진 여인이 배를 어루만지고 있다.

안정된 태동소리가 무대에 가득하다. 소년이 북을 치다말고 여인의 둥글어진 배를 들여다본다.둘 다 뭔가 재미있는 듯 낄낄거린다.

소년; 꼭 맹꽁이 배 같아요. 그 속에 무엇이 들어 있나요?

여인; 맞춰보렴?

소년; 음.알았다!

여인; 말해봐.

소년; 그거야 뻔하죠.

여인; 뭔데?

소년; 축구공.

여인; (웃는다) 아니야. 틀렸어.

소년; 그럼 뭔가요?

여인; 바로 너야.

소년; 저요?

여인; 그래.

소년; 정말 저예요? (배를 골똘하게 들여다보며) 후후,참 예쁘게 생겼어요.

여인; 알 수 있니?

소년; 네. 아주아주 귀여운 손가락을 가졌어요. 넓은 이마, 작은 입술, 천사 같은 마음을 가졌어요. 맘에 들어요.

여인; 하지만 점점 무거워지고 있어. 꼭 무거운 짐 같아. 아주 짐스러운 걸.

소년; 당신이 당신의 짐을 고스란히 들고 있기 때문에 무겁게 느껴지는 거예요. 당신의 짐을 벗어놓으세요.

여인; 그건 안돼. 누구나 살아가는 동안 자기 몫의 짐이 있는 법이야.

소년; 그런가요?

여인; 난 처음에 저 강 건너 길을 터벅터벅 걸어오면서 생각했어. 널 어떻게 할까,어머니 말씀대로 지워버려야 하나. 그런 생각을 하니까 무척 슬퍼지더구나.

오랜 동안 아이를 갖고 싶어 했어. 남편은 애 없이 둘이 살자고도 했지만.그런데 남편이 더럭 날 두고 떠났다고 해서, 귀하게 생긴 널 지워야 하나 생각하니 슬펐어.

그다지 큰 죄 지은 거 없이 살아온 나에게 왜 이런 일이 닥쳤을까 생각했어. 왜,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길래.인생엔 어처구니 없는 복병이 숨어있다가 예측할 수 없는 순간에 인간을 노리는 것 같아.

소년; 그건 단지 인간을 시험하기 위해서 그러는 거예요.

여인; 어머니는 집요하게 널 없애라고 했지만 어머니 말씀을 거역해 보긴 이번이 처음이야.

소년; 그런 무서운 일을 시키는 어머니도 있나요?

여인; 날 사랑해서 그래.

소년; 그건 나쁜 사랑이에요.

여인; 내가 널 사랑하는 것처럼 어머니도 날 사랑하기 때문이야.

소년; 슬픈 일이군요.

여인; 어쩔 수 없는 일이야.

소년; 어릴 때 쓴 시를 기억하고 계세요?

여인; 어릴 때 쓴 시?

소년; 기억해 보세요.

여인; 아! 이제야 기억이 나네. 그래 국민학교 때 담임 선생님께서 숙제를 내셔서

바다에 대해 쓴 시였어. 말해줄까? 노래 불러줄까?

소년 고개를 끄덕인다.

여인; 바다는 좋겠네

마음이 파래서

바다는 참 좋겠네

난 햇빛에 놀아서

피부가 까만데

햇빛에 놀아도

피부가 안 타서

바다는 좋겠네

난 멀리로 가면

엄마한테 혼나는데

여기저기 멀리멀리

여행 다닐 수 있어서.이것밖에 기억 나지 않아.

소년; 바다 냄새가 나요.

여인; 그때 담임 선생님께서 앞에 나와 읽으라고 하셨어. 이상하게도 숙제를 해온 애들이 별로 없었거든. 숙제를 안 해온 애들은 교실 청소를 했어.

그런데 이튿날 학교에 가보니 청소반장이던 옥경이라는 애가 내 시는 소년신문에 실린 다른 애가 쓴 시를 베껴 낸 것이라고, 자기가 그 신문을 봤다고 헛소문을 냈더라.

너무 억울하고 그애가 얄미웠었는데 알고보니 그앤 고아였더구나. 아직까지도 그 일이 기억나는 건 아마 그애가 고아이기 때문일거야. 그 앤 새벽에 학교 아저씨네 싸리대문 앞에 남몰래 버려진 간난동이였거든.

소년; 고아였군요.

여인; 그 애가 고아라는 소문이 학교에 나돌자 얼굴이 까무잡잡하고 누구에게든 지기 싫어하고 악바리같던 그 애는 그만 기가 죽어버렸지. 영 기운이 없어보였어. 결국 그 앤 나중에 서울로 입양되어 갔지. 그 애가 보고 싶을 때가 있어. 그 애는 잘 살고 있을까?

소년; 왜 아직도 슬픈 생각을 하세요. 걱정하지 마세요. 저 강을 건너간 혼은 생명을 얻어서 바다에 닿을 거예요. 바다에 닿은 생명은 세상이 길러줄 거예요. 제가 지키고 있는 아버지도 길러줬고 당신도 길러줬어요.저도 그럴 거예요.

여인;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내며 웃는다.) 난 아직 슬퍼.

소년; 아직도 슬프세요? 그럼 세상에 있는 좋은 걸 말해주세요.

여인; 꽃과 바다를 말해주었잖니.

소년; 또 다른 걸 말해주세요.

여인; 세상엔 또 좋은 게 있어. 그건 아침과 새벽, 그리고 밤이란다. 밤은 어둠을 지키는 시간이야. 밤에 높은 곳에서 세상을 내려다 보면 사람들의 집에서 빛이 새어나오는데 그건 마치 별천지 같아.

그런 아름다운 밤이 지나가면 시리디 시린 빛을 이끌고 푸르른 새벽이 깡총깡총 뛰어오지. 그런 다음엔 반드시 환한 빛을 몰고 아침이 어느덧 몰려오지. 그 다음엔 또 밤이 오고 그 다음엔 또 새벽이 오고 어느덧 아침이 온단다. 세상엔 그런 시간이 있단다.

소년; (벌떡 일어서며) 전 세상에 가고 싶어요. 이제 더이상 아버질 지키고 있을 수만은 없어요.

세상에 가서 바다를 보고 싶어요. 바다 냄새도 맡아보고 싶어요. 새벽과 아침과 밤도 느껴보고 싶어요. 가까이에서 꽃피는 걸 보고 싶어요. 전 참을 수 없어요. 이젠 어머니가 아버질 지킬 차례예요. 전 세상의 아이가 될 거예요. 어머니.

여인; (소년을 감싸안는다) 넌 에미의 피와 아비의 뼈와 우주의 입김으로 이루어진 거야. 넌 저 강을 건너 바다에 닿고 거기서 세상의 보살핌을 받을 거야. 어서 저 강을 건너가렴.

저 강을 건너 바다에 닿으려무나. 너를 위해 별이 되어 길을 밝혀줄께.

소년; 어머니, 전 어머니가 슬퍼하면 떠날 수가 없어요. 슬퍼하지 마세요. 어머니.

여인; 얘야 어서어서 저 강을 건너가렴. 강물이 더욱 불어나면 건너갈 수 없단다.

소년; 어머니, 슬퍼하지 마세요. 제 대신 아버지를 지켜주셔야 해요. 아버지와 더불어 별이 되어 저를 위해 길을 밝혀주셔야 해요.(자리를 털고 일어서며 춤을 추기 시작한다) 어머니 북을 쳐 주세요.

여인; 얘야, 모든 것을 버리면 그 다음에는 무엇이 남을까?

소년; 모든 것을 버리면 그 다음에도 모든 것은 고스란히 남아있어요.

여인; 그래. 모든 것을 버려도 모든 것은 전부 다 고스란히 남아서 세상을 이루지. 난 꽃을 버리고 열매를 얻었어. 네 아버지를 곁에서 지킬 수 있어.

어서 떠나거라. 저 별들을 바라보며 어서어서 강을 건너야 한다. 난 시간을 잊고 별이 되어 널 내려 다 볼 거야.

여인, 북을 치기 시작하면 소년, 작은 북을 치며 춤을 춘다. 아이의 태동소리 고조되고, 물소리, 새소리, 칼춤 같은 파도소리, 바람 지나는 소리, 온 무대를 가득 적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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